'책은 읽는 만큼 보여주고 영화에서는 보여주는 만큼만 본다'는 말은 대체로 옳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2008년)의 경우에도, "위대한 문장을 평범하게 그렸다"는 단평에 수굿하게 수긍이 가는 영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원작자인 주제 사라마구로부터 주연 여배우에 대한 극찬과 함께 "영화화가 갖는 각색의 자유와 원작에 대한 충실도, 모두를 만족시켰다"라고 인정받을 만큼 감독의 역량과 연기자들의 열연이 돋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문학적인 상상력을 갉아 먹는다"는 원작자의 평소 우려스러운 그림자에서 온전히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멀어버리고, 유일하게 남은 한 명의 눈에 비친 디스토피아의 참담한 이야기들을 똑같이 담아낸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이 각각의 선전 문구에 내건 "가장 두려운 건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이는 자에게 더 잔인한 눈먼 자들의 도시"와 "세상의 모든 눈 뜬 장님에게 사라마구가 외치다"라는 목소리만큼 동떨어진 울림으로 다가온다. 원작이 그냥 보이는 대로만 볼 뿐, 그 밑에 잠긴 본질은 보지 못하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온 세상의 눈 뜬 장님들에게 던지는 통렬한 우화라면, 영화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눈먼 자들의 잔혹한 도시를 헤쳐 나오는 눈뜬 주인공의 고군분투를 담아내는 한바탕의 모험담이다.
그 시작은 실로 창대하였으나 못내 서운하도록 밋밋하게 마무리되는 영화에 대한 갈증으로 소설책을 찾았다. 환상적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문에 걸맞게 '만약 한 도시, 한 국가 구성원 전체가 눈이 먼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라는 대담한 가상에서 시작하여, 유일하게 눈뜬 관찰자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시선으로 그 세계를 따라간다. 세상과 이어주던 창문이 닫히면서, 그토록 자부하던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무너지고, 인간이기 위한 최소한 규범이나 영혼마저 사라진 풍경.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작 중의 어느 작가가 황량한 풍경 속에서 안간힘으로 토해내는 하소연이다. 저 혼자 눈멀지 않았다는 행운과 차라리 함께 눈멀지 못한 불운 사이에서 힘겨워하던 주인공은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라는 깨달음을 재확인하기도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희망조차 말라버려 도시를 떠나자고 결심한 날, 눈 멀어버릴 때처럼 문득 눈들이 하나 둘씩 뜨여진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 순간에야 우리들이 보기에는 멀쩡하나 정작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였다는 사실에, 아프게 눈뜨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맹한 해피엔딩의 아쉬움에서는 벗어났지만, 결코 가벼울 수만은 없는 발걸음으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빠져나왔다.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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