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랑 최근배/木朗 崔根培(1910~1978)
눈 온 뒤
종이에 채색, 33×43㎝
1951년
개인 소장
전통 서화에서 사계산수화라면 겨울 경치는 으레 설경이다. 잿빛 하늘을 묵색으로 바림을 하고 희게 드러낸 산의 형상은 먹 선으로 경계를 그린 다음 농묵으로 흑백의 대비를 강조해 백설로 뒤덮인 강산을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에 앙상한 가지의 한림(寒林)묘사로 차고 고적한 겨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그러나 라는 이 작품은 구성이나 착상에서 그런 전례의 동경산수와는 전혀 다른 현대적인 감각의 새로운 설정을 하고 있다. 가지마다 흰 눈을 가득 인 채 허공의 달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올려다 본 것이 모티브의 전부다. 구성은 마치 절지화에서처럼 전면에 나무 일부만 크게 부각시켰지만 그 구도나 배치 방식이 이전과는 매우 다르다. 더 큰 차이는 묘사하는 방식으로, 매화나 대나무 등 특정한 화제의 경우 사물의 상징적인 형상이 서법의 필획으로 표현되었는데, 이 그림은 정교한 필선과 채색으로 실경을 옮기듯 설명적이고 구체적이다.
유화에서처럼 양감이 부여되어 있다거나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동양화의 방식이 양화적인 표현 기법과 융화된 모습을 보인다. 세필을 균일하게 써서 나무 둥치의 전체적인 형태를 섬세한 윤곽선으로 그리는 데서 구륵법과 몰골법을 병행하여 그리는 우리 전통 서화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겨울 설경의 표정은 색채를 배제하고 흑백으로만 나타내는 것이 특징인데 이렇게 은은하면서도 우아한 채색을 가미하여 한결 근대적인 맛을 살렸다.
유학에서 돌아온 목랑은 1937년부터 조선미전의 신예로서 괄목할 만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1940년에는 동양화부의 최고상인 창덕궁상까지 받는다. 그러나 해방 후 국전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는데 거리를 둔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조선미전에서의 경력이나 채색수묵화의 일본적인 특색과 관련은 없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동양화의 경우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온 북화 계열의 채색화 전통을 충분히 근대적인 감각으로 발전시키기 전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바람에 양화와 마찬가지로 수묵화에서도 일본의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작가는 유학 시절 양화와 함께 일본화를 같이 습득했다. 전통의 참고나 향토색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조선미전의 수묵채색화 분야는 일본화의 모방이 지배적이었는데, 그 자신이 선전의 비평 논객으로 활약하면서 창조정신과 시대감각을 갖출 것을 역설했다. 동양화를 보수적인 남화 계열과 일본 화단을 추종하는 일본화 계열로 나누면서 양쪽 모두를 비판하며 양화의 사실성을 배워 독자적인 길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미술의 기법이나 매체 자체를 탓할 수야 없지만 당시 일본 특유의 정서를 반영하는 문화적 양식이라는 데에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민족적인 소재를 탐구했고 또 특유의 조형감각으로 우리의 자연과 정서를 추구했다. 그의 작품에서 짙게 배어나는 서정성은 심미주의자로서 시대감각과 역사의식의 일단을 보이는 것도 있다. 이란 작품에서 핏자국 같은 노을빛으로 분단의 비극과 북쪽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보름달이 은은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나무에 얹힌 흰 눈이 달빛에 교교하게 빛나 고적함을 더한다. 1951년 작이라면 전란의 고통을 겪던 와중인데 포화가 할퀴고 간 뒤일까. 모지라진 가지들의 옹송그린 모양새를 그저 예사롭게 볼 수만 없게 한다. 독특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이런 감정적인 요소가 재학 시절 그의 초기 유화에서 나타난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 새로운 표현주의로 느껴진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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