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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원태의 시와 함께] 이상한 기억 / 송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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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스탠드 건너 당신은 앉아 있고

나는 세월 건너편 낡은 벤치에 앉아 있다

그 사이로 계곡이 있었던 듯하기도 하고 잠시, 여우비가 스쳤던 듯

하기도 하다 달빛이 얼굴 위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던 것 같기도 하고

간선도로에 자욱한

모래의 융단이 깔린 듯하기도 하다

수많은 이정표와 자동차 바퀴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껏, 소스라치는 마른 나뭇잎, 나뭇잎 한 장의 모질고 쓰린 기억들

세월 건너편 낡은 벤치 위에 당신은 앉아 있고

나는 동그란 스탠드 앞에 앉아 있다

안개가 많은 것들을 지운 듯 세상은 어렴풋하고

달력 속에서 나는

무릎을 세우고 엎드려 울었다

어느 순간 덜컥, 빗금을 그으며

계곡 또는 단애가 들어섰을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 있었던 듯하고 못물 속에 깊숙이 가라앉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아마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을 것이다

스탠드의 불이 나가고 당신은 세월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모래와 꽃과 바람을 받으며 여물어갔다

세월인 당신, 얼룩인 당신,

가끔 슬픔이라는 짐승이 드나들기도 하지만

당신에 대해 나는 아주 이상하고 단단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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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스탠드 건너" 앉아있던 당신. 나는 당신을 떠나 어느새 "세월 건너편"에 와 있다. 세월이란, 계곡 또는 단애, 여우비와 달빛 소나기, 혹은 모래의 융단 같은, 일테면 우리의 마음에 침식/풍화작용을 일으키는 "이상한" 것들이다. 그에 비하면 기억이란, "기껏, 소스라치는 나뭇잎" 한 장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 격절의 단애(斷崖) 앞에서, "우리는/ 들판에 있었던 듯하고 못물 속에 깊숙이 가라앉았던 것 같기도" 할 게다. 그리하여 떠나가 버린 사랑이란, 그저 "세월"이자 "얼룩"인 것. 이제 당신은 그렇게 "아주 이상하고 단단한 기억" 덩어리로만 내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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