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과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C는 새로 생긴 야구연습장 앞에 멈춘다. 동전 한 개를 넣으면, 열 개의 공을 칠 수 있고 홈런을 치면 보너스로 열 개를 더 칠 수 있다. 거의 20여년 만에 잡아보는 배트지만 헛스윙 몇 개 한 후에는 제법 잘 맞은 공을 쳐냈고 결국 홈런 볼도 쳤다. 보너스 공을 받게 되자 어린 아이처럼 좋아한다. 어릴 때 야구를 하며 놀던 기억이 40대인 그에게 활력을 가져다준 것이다. 기억이 가져다준 보너스다.
이 책은 47세에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서 기억이 80분만 지속되는 한 수학박사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는 해마가 기억정보를 최종적으로 대뇌 측두엽으로 보내 장기 기억으로 저장되지만 박사는 이 과정에서 손상을 보인다. 80분만 지나면 모든 새로운 정보는 삭제되어 또 낯선 일이 되어버린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한 수재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평온한 생활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기억장애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대인관계도 모두 단절되어 수학 잡지의 현상문제에 응모하여 푼돈을 버는 것 외에는 64세가 되도록 시골에서 은둔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예를 들어 가정부가 생일이 2월 20일이라고 하자, 220과 자신의 시계에 새겨진 284라는 숫자는 특별한 관계다, 220의 진약수(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를 모두 더하면 284가 되고 역으로 284의 진약수의 합은 220이 되어 220과 284는 친화수라고 설명하면서 그녀가 자기에게 친밀한 존재임을 표현한다.
한치의 오차가 없는 수학적 치밀함 이면에 그는 야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 유명 야구 선수의 광팬이었고 야구 경기는 모두 숫자로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다. 수학박사에게 수는 자신과 세계를 연결해 주는 입구이자 소통 창구이다.
오랜만에 야구 방망이를 잡아도 몇 번의 헛스윙 끝에 공을 쳐낼 수 있는 것은 야구 동작을 소뇌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수와 쓸데없는 동작을 유도하는 신경세포의 시냅스는 회로에서 삭제되고 지워지지 않고 엄선된 세포만 소뇌에 남아 운동을 즐기게 한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나, 구구단 외우는 것은 소뇌의 역할이다. 대뇌의 기억은 새로운 것을 써넣는 방식이라면, 소뇌의 기억은 지우기 방식이다. 박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두 가지, 수학과 야구, 대뇌와 소뇌의 의미이기도 하다. 생각을 반복하면 대뇌에 있는 이미지가 소뇌로 복사되어 저장되고 이것은 다시 대뇌의 사고 작용에 이용되어 소뇌는 운동기억 뿐 아니라 생각 기능에도 중요하다. 몸을 움직이거나 다리를 흔들거나 소리를 내면서 공부를 하면 대뇌와 소뇌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말이 바로 이 같은 원리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아는 것, 모르는 것 총동원해서 부지런히 말하고, 나이가 조금 들면 게을러져서 기억나는 것만 말하고, 나중에 귀밑털이 하얗게 되면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고 한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의 90%의 이름을 잊고 우리가 알고 있는 99%의 전화번호를 잊고 산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박사처럼 상해를 입거나 질병에 걸리지 않는 한, 우리의 머리는 그 어떤 것도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단지 회상에 실패할 뿐이다. 가끔은 지난 일을 회상하며 즐거워지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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