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작영화 리뷰] 하녀(下女)

대저택의 하녀, 그녀에게 어느날 은밀한 유혹이…

하녀(下女).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다.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하니 천하다고 아래 하(下)자가 붙는다. 그런데 이 하녀에게는 은밀한 본능과 파렴치한 자본, 옹졸한 남성의 허위의식이 배어 있다. 하녀 대 안주인의 처절한 계급갈등까지 녹아 있으니 하녀는 어떻게 보면 한국 산업화 사회의 갈등과 문제를 온 몸에 수태한 직업군이라 하겠다.

고 김기영(1919~1998)의 '하녀'(1960년)는 이러한 상징의 대표적인 영화다. 여공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근엄하고 점잖은 피아노 선생(김진규)이 하녀(이은심)에게 잠시 혹했다가 아내(주증녀)와 아들(안성기)까지 위험에 빠트리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하녀는 전형적인 팜므 파탈(치명적인 위험을 가진 여인)이지만 사악한 피아노 선생 또한 치졸한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옹졸한 남성의 전형을 가지고 있다. 짝사랑에 빠진 여공에게 "여공의 불장난으로 내 식구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어!"라며 사감에게 고자질하는 비겁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아내도 하녀의 뱃속 아이를 죽이기 위해 사악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하녀의 복수는 관객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농촌의 처녀들이 도시로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던 1960년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중산층이 생겨나고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에 계층간 갈등이 빚어지던 산업화 시대를 하녀를 통해 잘 풍자해주고 있다.

반세기 만에 나온 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리메이크가 아니라 모티브만 따 왔다.

이혼 후 식당 일을 하면서도 어렵게 살아가던 은이(전도연)가 유아교육과를 다닌 이력으로 상류층 대저택의 하녀로 들어간다. 완벽해 보이는 주인 남자 훈(이정재), 쌍둥이를 임신한 안주인 해라(서우), 여섯 살 난 딸 나미, 나이든 하녀 병식(윤여정)이 거대한 저택에서 가족을 형성하고 있다.

어느 날, 주인 집 가족의 별장 여행에 동행하게 된 은이는 자신의 방에 찾아온 훈의 은밀한 유혹에 이끌려 육체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이후에도 은이와 훈은 해라의 눈을 피해 격렬한 관계를 이어간다.

임상수의 '하녀'는 슬픈 치정극이다. 저택에서 벌어지던 긴장감이나 갈등보다는 에로틱 서스펜스에 주력하면서, 기괴한 관계에 더 할애한다. 가족은 사랑과 관심으로 이뤄지는 사회 단위다. 그러나 훈의 가족에게는 이들이 사라진 채 우아한 포도주와 네일 케어, 화려한 욕조만 놓여 있다. 화려하지만 그 속은 비어 있다. 있다면 거대한 재력의 힘이 작용할 뿐이다.

이러한 황량함은 도입부에서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 골목. 한 여성이 건물에서 뛰어내린다. 모두 호기심으로 바라볼 뿐, 무관심하다. 아무도 타인의 내면에 관심을 갖지 않는 군중 속의 고독한 현대 세태를 보여준다.

은이는 사실 팜므 파탈이 아니라 둔하고 맹하고 백치인 인물이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 반면 어린 나미를 뺀 모든 사람들은 돈의 노예다. 훈은 은이에게 욕구를 해소하고 거액의 수표를 들이민다. "돈이면 다 되는 것 아냐?"라는 식이다. 장모도 딸에게 "잘난 남편 바람 피우는 것은 감수해야지"라며 나중을 기약(?)하라고 말한다. 나이든 하녀는 '하녀 근성'이 몸에 밴 인물이다.

주연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며, 전도연의 노출도 상당한 편이다.

그러나 하녀인 전도연에 일로매진하지 않는 바람에 밀도감이나 긴장감이 떨어진다. 하녀와 안주인, 하녀와 바깥주인, 하녀와 장모, 하녀와 나이든 하녀, 하녀와 주인집 딸, 하녀와 친구 등의 관계가 별개로 형성되는 바람에 산만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정사 장면이나 진지한 상황에서도 관객의 웃음이 튀어나오는데 그것이 더 기괴해 보인다.

감독은 사회성을 엮으려는 시도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원작과 다른 파멸의 대상과 다소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돈 앞에 장사없다"는 허무한 결말이다. 화면 구도나 배우들의 호연, 스크린에 뿌려진 색감 등이 돋보이지만 그 결말이 지독히 허무한 바람에 무기력증까지 느껴진다.

원작의 밀도가 사라진 씁쓸한 욕망과 슬픈 하녀의 이미지를 통해 그려진 그로테스크한 치정극이랄까. 거기에 감독이 마스터베이션까지 해대는 영화다. 러닝 타임 106분. 청소년 관람불가.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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