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영화 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장면들이 스틸처럼 한 장씩 떠오른다. 시위가 벌어지는 대학의 한 모퉁이에서 난상토론을 하는 영훈(정보석 역)과, 시골로 내려간 영훈이 정님(이혜숙 역)을 만나는 처연한 광경, 점순(배종옥 역)과 같이 폭설이 쏟아지는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장면들이다. 곽지균 감독은 이 영화로 대종상을 휩쓸어 시대의 트렌드에 정통한 스타로 부상하였다.
그 시절 대학생이면 누구나 영화 속의 영훈처럼 시대에 대한 좌절에 힘겨워했을 테고 이성을 만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나누면서 가슴 아픈 방황을 했을 것 같다. 실로 우리의 지난 시절은 방황으로 얼룩져 있었다. 요즘처럼 취업이나 학업에 경쟁적으로 내몰리지 않아 더 그랬는지 모른다. 방황을 했으면서도 어떤 가능성이 꿈처럼 무한해서 자신만이 겪는다고 믿는 슬픔이나 고통도 아름답게 빚어지고 찬란한 색채를 더했다.
특히 이 시절에는 예술에 대한 경사도 가팔랐던 것 같다. 걸핏하면 시화전을 열었고 낯선 음악을 들으러 시내를 쏘다녔다. 예술의 향취는 젊음의 낭만적 감각과 어울려서 무수한 젊은이들로 하여금 예술가를 꿈꾸게 했으며 젊음을 탕진시켰다.
물론 젊었을 때 예술을 하고 싶은 내적 동기가 일어나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오히려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예술은 많은 부분에서 젊은이를 성장시키고 상상력을 촉발시키기 때문에 장려할 만하다. 예술의 역할은 과거보다 오늘날이 더 필요한 것도 같다. 며칠 전 제2차 유네스코 문화예술교육대회에 참석한 의 저자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교수는 "21세기의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상력과 창의성을 일깨우는 교육이 요구되고 그 열쇠는 예술"이라고 단언하면서, 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그 성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상상력의 성가는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일찍이 우리는 예술로부터 받아들이는 어떤 감수성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젊음은 그 자체로 이미 예술적이지 않은가. 슬픔을 더 슬퍼하고 작은 즐거움을 크게 부풀리고 어떤 대상을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예술적 감성이라면 젊음의 감성도 이와 흡사하다. 모든 예술가들은 젊음의 감성을 가지고 있고 젊음은 또한 예술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술에 대해 감동하는 힘은 우리를 창의적인 사회인으로 진입시키기 위한 발판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젊음은 예술에 사로잡혀 아예 자신의 진로를 이쪽으로 결정한다. 한평생 예술을 꽃피우며 살겠다고 어떤 두려움도 없이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젊은 날의 초상'이다. 젊은 날의 애잔한 광휘 속에서 예술가가 탄생된다. 젊음을 빼고는 예술이 성립되기 힘들듯이, 모든 예술가는 이후에도 자신의 젊은 시절을 되새기며 한평생 예술에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달라진다. 정신적인 젊음마저 계속 유지되기 힘들고 예술의 감응도 어느덧 벅차다. 갈수록 낡고 쇠해져서 예술의 특성인 젊음이 작품 속에서 바래지는 것이다. 그래서 금주 초에 있었던 한 영화감독의 죽음은 참 스산하게 다가온다. 그가 만든 영화의 대부분이 젊은 시절의 핍진한 방황을 아름답게 그려내었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 , , 등을 만든 곽지균 감독이다. 그는 시대성과 젊음의 트렌드를 탁월하게 묘사해온 영화인이 아니던가. 그의 주검 곁에는 "일이 없어 괴롭고 힘들다"는 문장(文章) 하나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더러 문화예술인들이 세상을 뜨기도 하지만 그의 죽음은 영화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했기에 영화적이다. 그의 옆에 놓였던 안타까운 문장은, 주류(主流) 혹은 세대에서 밀려나 절망하고 있는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애가(哀歌)처럼 들린다.
나는 이즘에서 그 감독이 만든 영화 '젊은 날의 초상' 속에 들어있는 대사 하나를 끄집어내어 오랫동안 되뇌어본다. 주인공 영훈이 방황을 끝내고 돌아서며 포효했던 그 말은, 이제는 부질없어 보이지만 영원한 진실임이 틀림없는 명대사이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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