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륙능선을 갈라 보낸 뒤 비슬기맥은 사룡산(686m)을 떠나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초기 지향은 서쪽, 같은 방향 주행은 5.2㎞에 걸쳐 지속된다. 그 북편에는 영천 북안면 상리가 자리하고, 남쪽 산자락에는 청도 운문면 마일리·정상리가 붙었다.
이 동·서 구간 비슬기맥서 가장 낮은 곳은 '오재'(375m)다. 이 최저점이 최고점 사룡산과 불과 1.6㎞ 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 능선 흐름이 상당히 가파르다. 3단 뛰기로 쏟아져 내린다. 그 중 두 번째 급락했다가 잠깐 솟는 497m 암봉을 그 남쪽 '괴틀' 마을서는 '칼바위등'이라 불렀다. 괴틀은 20가구 미만의 마일리 최북단 자연마을이다.
사룡산서 내려서는 데 20분이 채 안 걸리는 오재는 운문~북안을 잇는 주 통로로 부상해 있다. 오래 전 721호선 지방도가 개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에 따르면 옛날 도보시대 중추 교통로는 오재서 서쪽으로 800여m 더 가서 닿는 '밤재'(400m)였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북안 쪽에선 6·25전쟁 때만 해도 모두 밤재를 통해 피란 갔다고 했다. 밤재의 그런 유명세 영향으로 청도 쪽 그 바로 밑 저수지는 '밤재못', 그 아래 골은 '밤재골'로 불린다. 이들과 재 너머 영천 '두곡지'를 잇는 게 옛길이라 했다.
밤재서 청도·영천 양쪽으로 이어지는 길 자리는 여전히 뚜렷했다. 그러나 밤재에 수백 년 쌓여온 지역민의 애환은 진작 잊혀졌음에 틀림없다. '국가기본도'조차 밤재가 어딘지 옳게 지목해 내지 못하는 게 단적인 증거다. 1대 25,000 지형도는 오재 자리 양옆에다 '오재' '밤재'를 나눠 기록함으로써 뭐가 뭔지 알아먹을 수 없게 만들어 놨다. 축척이 너무 커 흐지부지할 수 없었을 1대 5,000 지형도는 '밤재'라는 명칭을 아예 지워버렸다. 이게 우리 국가기본도 제작의 현 수준이다.
오재서 밤재 가는 산길을 함께 답사한 누군가는 "꼭 삼림욕장 온 것 같다"고 했다. 길이 편안하고 숲이 좋다는 뜻이었다. 하나 밤재를 지나면 산줄기는 순식간에 140여m 솟아 538m봉에 오른다. '대동여지도'가 사룡산과 구룡산 사이에 특별히 하나 표시해 둔 '수암산'이 이것 아닐까 싶다.
잠칭 '수암산'을 지나면 산줄기는 다시 90여m 가라앉는다. 영천 북안과 청도 운문을 잇는 오재-밤재-수암재 3대 고갯길 중 마지막 것인 해발 450m의 '수암재'다.
거기로 이어지는 도로는 자동차 한 대 겨우 다닐 정도로 좁다. 하지만 그건 단순 임도나 농로가 아니라 당당한 마을 진입로다. 청도 마일리 큰 마을서 올라오며 '아랫수암'을 연결했을 뿐 아니라, 수암재를 지나서도 서쪽의 '윗수암' 마을을 잇는다. 게다가 수암재~상리(북안) 구간도 말끔히 다듬어져 몇 년 전부터는 청도~영천 사이까지 온전히 연결하게 됐다.
수암재(450m)서 구룡산은 25분 미만 거리다. 582m봉으로 오르느라 10여 분 애쓴 뒤 한숨 돌리고, 625m 높이의 '무지터 삼거리'에 도달해 또 한 번 숨 고르면 이후 5분 내 정상에 닿는다.
그 삼거리서 산 옆구리 길을 타고 오른쪽(북쪽)으로 걸으면 곧 '무지터'에 닿는다. 희미하게 생겨나오는 능선 위에 반석이 넓게 펼쳐지고 인접한 골에서는 샘이 솟는 곳이다. '실꾸리 한 개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못할 만큼' 깊은 그 샘에서 용 9마리가 태어나 이 산이 '구룡산'이 됐다고 했다.
그래서 기우제 혹은 무지도 바로 그 샘터에서 올려졌다고 했다. 또 그런 전설에 따라 예부터 일반 기도객들도 끊이지 않아 초파일 같은 날엔 인산인해였다고 한 어르신이 회억했다.
저 무지터에 못잖은 구룡산 명소가, 수암재를 관문으로 삼는 윗수암 마을이다. 구룡산 정점을 향해 2㎞에 걸쳐 뻗어 오른 골짜기의 최상류에 자리해 전망 뛰어난 덕분이다. 북동편으로는 사룡산이 통째 바라다보이고 남동편으로는 장륙능선-석두능선-낙동정맥 산줄기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마을 안에서는 옛날 보던 그 외양간이 그대로 보이고, 풀밭에선 어미소와 송아지가 한가로이 눕거나 풀을 뜯는다. 다랑논은 묵었지만 군데군데 일궈진 밭에서는 할머니가 김을 매고 있었다.
최고 연장자 어르신은 마을 4가구가 모두 경주 최씨 일족이며 3가구가 형제고 1가구는 재종간이라 했다. 20ℓ짜리 분무기를 짊어지고 농약을 뿌리던 어르신은 "81살이지만 아직 이 정도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못 고쳐 애 탄다"고 했다. 도시에 살면서 근친 오는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을 생각해서일 터이다.
이 수암마을(운문면 마일리, 윗수암 기준 해발 520m)은 구룡산 정상부 일대에 포진한 3개 자연마을 중 하나다. 그 서편에는 청도구룡마을(운문면 정상리, 해발 520m), 더 서편에는 경산구룡마을(용성면 매남리, 해발 540m)이 있다. 구룡산을 기준으로 보자면 수암은 그 남동쪽, 청도구룡은 남서쪽, 경산구룡은 서쪽에 순차대로 550여m씩의 직선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리했다.
셋 중 가장 큰 마을은 경산구룡이다. 그곳 어르신에 따르면 경산구룡은 한창때 37호나 될 만큼 번성했다. 지금은 산간벽지로 치부되지만 농경사회 때는 오히려 들녘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마을이기도 했다. 평야지대는 수리시설 미비로 벼농사를 못하기 일쑤였으나 이곳은 어떤 가뭄도 타지 않을 정도로 물이 많고 들도 넓었다. 여느 산촌은 땔감·산나물을 해다 팔아 생계에 보탰으나 여기선 벼·보리·콩 농사만으로도 충분했다.
걷기가 주 이동방법이던 그 시절로선 외진 마을도 아니었다. 영천·경산과 청도·경주를 내왕하는 행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을 대상으로 한 주막이 줄을 이었을 정도다. 구룡산과의 사이에 있는 마을 뒤 '다박재'에도 주막이 성업했다.
일제 때는 이 마을이 벼 공출 임무가 면제되는 열외지역이기도 했다. 공출용 가마니를 짜기 위해 다른 마을들처럼 밤 새워 고생할 이유가 없었다. 산속이라 땔감이 풍부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고, 고지대인 덕분에 여름은 시원하게 보냈다. 이렇게 여건이 좋으니 총각들은 신부를 골라가며 장가들 수 있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게 변했다. 숱한 집들이 비게 돼 지금 실거주자는 10여 호에 불과하다. 마을 어르신은 아파도 병원 가기 쉽잖은 게 가장 안 좋다고 했다. 버스가 안 다니니 왕복 2만6천원이나 주고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과 몇 천원이면 되는 진료비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다.
구룡산 자락에는 저 세 마을 외에도 수암재 꼭대기 너머 영천 상리 땅에 살림집이 한 채 있다. '청도수암'에 대비시켜 '영천수암'이라고나 할까. 아랫수암서 태어났다는 그 집 어르신(72)은 자신이 어릴 적만 해도 아랫수암에 17가구, 윗수암에 15가구나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아랫수암엔 2가구가 각각 외딴집으로 흩어져 있다. 윗수암엔 민가 4채 외 그 위 높은 곳에 '수암사'라는 절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 다시 찾았더니, '영천수암' 그 어르신 집도 비어 있었다. 병원 다니기 불편해 산 아랫마을에 또 다른 거처를 구했다는 얘기였다. 산촌과 농촌이 비어가는 과정을 보는 듯했다.
이런 마을들과 무지터 및 구룡 전설이 아니더라도 구룡산은 중요한 산이다. 여러 고을을 경계 짓는 산줄기가 거기서 북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산줄기는 먼저 영천(북안면)과 경산(용성면)을 가른 뒤, 서편으로 굽어 달리며 용성면과 대창면(영천), 자인면(경산)과 진량읍(경산)을 차례로 구획해 나간다.
인접 마을서 무지터~오재 사이 산길을 주기적으로 관리한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도 구룡산의 저런 중요성들에 인연한 바일 터이다. 인근 동네에 그만큼 중요한 산이란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올라서 보게 되는 산 정상부는 '버려져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무하다. 일부만 간벌돼 겨우 한쪽만 전망이 터졌을 뿐 아니라 정상점 일대도 잡풀들로 어수선하다. 저다지 중요하다는 산 정점을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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