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불볕더위다. 한바탕 비가 지나갔지만 더위는 마찬가지다. 매미가 운다. 낮게 그리고 높게 쉼없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 여름의 소리다. 불더위 속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오래전 동경에 갔을 때다.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풍경이 있었다. 한더위 때라 그곳도 여름 휴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게나 사무실이 문을 닫았다. 낯선 도시의 낯선 거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더욱이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황금 연휴에 머물렀던 내게 그 거대한 도시의 이미지는 철시한 장터 같다고나 할까. 불덩이 같은 한여름의 햇살은 보도 위에 고여 들고, 뙤약볕을 받은 도시는 그림 같은 정적 속에 잠들어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붐비는 곳이 있었다.
서점이었다. 서점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몇 집 건너 문이 열려 있는 서점마다 사람들이 붐빈다. 더러는 서서, 더러는 앉아서 책을 읽거나 고르고 있는 사람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한동안 취한 듯 바라보았다.
그 무더운 여름날, 텅 빈 도시에서의 오후 한때를 저렇듯 열심히 책을 읽고 있는 일본 사람들.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은 그 순간 눈 녹듯 사라져 갔다. 그저 그들이 부러웠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돋보기안경 너머로 책을 고르는 할머니, 할아버지, 젊은이들이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남녀노소를 포함한 고른 독서층이 돋보였다.
일본의 저명한 사회학자는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한다.
"일본을 바짝 따라오는 한국이 두렵다. 지칠 줄 모르고 뒤쫓아오는 그 놀라운 저력이 일본을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신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멀리하는 국민은 책을 가까이하는 국민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기에 안심이 된다."
안정되고 부유한 나라의 국민도 책 읽기에 저렇게 열심이다. 과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나 둘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서점들. 심지어 대학가 서점도 줄어든다고 한다. 그만큼 책 읽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은 아닐까. 밖에서 보면 우리의 실체가 더 드러나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자성의 소리가 가슴 위로 흘러내린다.
하기야 우리나라에도 대형 서점들이 있고 작은 서점들도 여기저기 있다. 가끔 대형 서점에 가 본다.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책들 사이사이로 붐비는 사람들을 본다. 대부분 청소년, 대학생층이다. 참으로 보기 좋고 든든한 모습이다. 한쪽 바닥에서 열심히 전공인 듯한 책을 탐독하는 모습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러나 지극히 편중된 독서 인구임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나이 든 사람이 거의 없다. 남녀노소를 포함한 고른 독서층의 저변 확대가 필요한 것이다. 시급한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되는 것은 혼자만의 기우일까.
인생에 대한 끊임없는 통찰력과 예지, 끝없는 인내와 각고의 노력, 쓰러져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의지의 밑바탕은 독서의 힘이라고 하지 않던가.
육체적인 배고픔을 음식으로 채우듯 정신적인 허기는 독서로 채워야 할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정보의 샘은 신간에서 얻고 고전을 통해서는 정신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다.
시대와 시대를 건너오면서도 살아남은 인간 정신의 광맥이 고전 작품이라고 하지 않던가.
짧은 인생을 길게 사는 방법의 하나로도 독서의 매력을 손꼽지 않을 수 없다.
영웅 나폴레옹도 유명한 독서광이었다고 한다. 전쟁터의 말 위에서도 책을 읽었다는 독서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있다.
불더위 속의 여름날 책을 읽는다. 차가운 방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책을 읽는 재미. 자연의 화음인 매미 소리와 함께 책장을 넘기는 재미. 이 모든 것이 멋있는 여름 풍경이 아닐까.
허정자 수필가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