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도 수억원대의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 수집가들이 꽤 있다. 미술시장이 한때 과열되면서 '좋은 그림' 하면 으레 고가의 그림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좋은 작품은 화폐 가치와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연을 간직한 작품이 더 소중하게 대접받기도 한다. 매일 작품을 다루는 작가와 큐레이터들은 어떤 작품을 가장 소중한 작품으로 손꼽을까.
화가 권기철 씨의 화실에는 '모내기'라고 쓴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서예 작품이 걸려 있다. 이것은 권 씨의 '애장품 1호'다. 7년 전, 서예가인 친구가 서예 심사를 하다가 낙선 작품 중에 우연히 발견한 작품이다. 그 친구는 작품이 너무 좋아서 표구를 했고 권 씨는 이 세 글자에 반해 자신의 작품과 바꿨다. 작업실을 찾는 사람들 중에 눈 밝은 이들은 이 글씨에 감탄하곤 한다.
"고졸미(古拙美)가 있고 천진난만한 작품이에요. 학원에서 훈련받은 적 없는 학생이 서예실기대회에서 정성을 다해 완성한 작품이죠. 아주 훌륭하고 좋은 작품입니다."
권 씨는 그 작품 앞에 서면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의 묵은 때가 씻겨나가는 기분이라고 한다. 돈과는 전혀 관계없지만 이렇듯 한 초등학생의 습작이 귀한 작품 대접을 받기도 한다.
아트선재미술관 이두희 큐레이터는 대학 강의시간에 뜻밖의 작품을 만났다. 학생들이 사용하는 화판의 밑종이에 오랜 시간 작품의 흔적들이 조금씩 쌓여 의외로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고 있었던 것. 그는 화판의 밑종이를 오려와 감상한다. "미술작품이라고 고가여야 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해요. 편견을 버리면 아름다움 그 자체가 보이니까요."
이 큐레이터는 평소에도 미술대학 졸업작품전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좋은 작품과 만나게 된다. 막 미술대학을 졸업한 학생이라 작품 가격도 비싸지 않다. 화가의 유명세, 투자 가치 등 그림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만 버리면 저렴한 가격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소장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큐레이터의 지론이다.
매일 작품을 그리는 화가들은 의외로 작품 욕심이 적다. 회화 작가들은 회화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권정찬 작가는 대신 국내산 벼루 수백 점을 소장하고 있는 벼루 마니아다. 그 중 특히 아끼는 것은 목연(木硯)과 출수연(出水硯). 나무로 만들어진 벼루는 가볍기 때문에 떠돌이 화가들이나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양반들이 괴나리봇짐에 넣어다니던 것이고, 출수연은 물이 벼루 속에 갇힌 독특한 구조로 아주 귀한 벼루다. 권 작가는 "벼루는 중요한 그림 도구인데다 그 문양이 회화적이고 조각도 훌륭해 모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8년간 큐레이터 생활을 해온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에게는 사연이 있는 작품 한 점이 있다. 1996년, 고 변종하(1926~2000) 화백의 전시를 진행할 때다. 김 큐레이터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변 화백이 결혼 선물이라며 작은 접시 하나를 선물했다. 변 화백은 그에게 "내가 안 죽고 대구에 전시하러 다시 오마"라며 손을 잡았다. 한 해 수백, 수천 점의 작품을 다루는 그가 유독 거실에 있는 도자기 작품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노 화백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다시 오겠다던 그 눈빛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변 화백은 평생의 작품 활동을 정리하고자 고향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었어요. 휠체어를 타고 고향 친구들을 만나 즐거워하시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네요."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