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미를 구미 당기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19)소병삼씨

수입의 10%는 무조건 봉사를 위해 사용하는 '착한 기업인'

"지금은 옛날보다 줄었지만 수입의 10%를 봉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렵게 자란 터라 딱한 사정을 보면 저도 모르게 돕게 됩니다. 하지만 누가 도와주는지도 모르게 해야죠."

대구에서 태어나 울산과 상주, 칠곡, 구미 그리고 서울생활을 거쳐 1988년부터 구미에 정착한 소병삼(50)씨는 조용하게 그리고 이름 없는 봉사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착한 기업인'으로 통한다.

5년째 하고 있는 저소득층 아동들을 위한 지역센터 재정지원과 어려운 가정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원, 사회단체장 및 회원활동을 통한 청소년 후원, 불우이웃·홀몸 어르신 돕기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용한 '사랑나눔'은 이제 그의 삶 일부가 됐다.

그는 아동들에게 후원금을 전해줄 때도 '드러나는 전달 행사'를 하기보다 통장과 도장을 나눠주면서 직접 돈을 찾도록 해 그들이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한다. "도와주면서 상처를 주면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1988년 시작한 구미에서의 개인사업은 한때 4개 업체를 경영할 만큼 형편 좋은 시절도 있었다. 이때는 일정액의 고정기부 외에도 수입의 20~30%를 내놓았단다. 기업체 축소로 지금은 10%로 줄었으나 그는 '50%까지'라는 목표를 세워뒀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의 지난 세월은 아픔과의 싸움이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뼈저리게 겪었던 가난과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상처는 너무 깊었던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5남매의 셋째인 그는 공직에서 퇴직한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여기 저기 옮겨 다녔고, 4군데 학교를 전전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급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미래는 뒤죽박죽이 됐다.

초교를 중퇴한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칠곡과 구미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곧 이뤄질 것'으로 믿었던 학교생활을 생각하며 틈틈이 주경야독에 들어갔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한 학업중단은 쉽사리 이어지지 않았고, 때문에 군대에도 갈 수 없었다.

그의 학업에 대한 꿈은 1981년 군면제 이후 시작돼 1994년 초·중·고교 과정 검정고시 합격과 대학교 과정 완료까지 13년, 초교 중퇴 이후 24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덕분에 그 흔한 '동기동창생'도 없다. 그래서 남들처럼 동기동창생 있는 것이 소원이었던 적도 있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은 2001년 대학원 입학, 2003년 석사졸업, 2010년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이란 새로운 도전으로 다시 타올랐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그가 꿈꿨던 동기 동창생이 생겼다. 그의 새 도전은 또 다른 꿈인 사회복지 분야 사업을 위한 것으로, 1990년 결혼한 부인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다.

"수입의 사회 환원, 봉사와 이웃사랑은 자신을 위한 것이 돼서는 안된다"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했고, 봉사로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면 하늘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는데···"라며 자신의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소병삼씨. 그에게 '봉사'는 어려운 어린시절을 견뎌내고 얻어낸 위대한 유산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매일신문 경북중부지역본부· 구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