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시립박물관에 가면 재미있는 전시물이 있다. 한국 상표가 붙은 막걸리 용기나 유리병, 부서진 장난감 같은 잡동사니를 잔뜩 그러모아 놓은 것이다. 웬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그 직원은 "바닷가에서 초등학생들이 부산에서 떠내려온 것을 주워온 것"이라며 "환경교육을 위한 전시물"이라고 말하고는 기자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낯이 뜨거워졌지만 얼핏 이런 생각도 들었다. 240㎞나 떨어져 있지만 부산에서 하기까지는 그만큼 가깝고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지 않은가.
일제 강점기 때에도 그러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신천지' 한반도에서 이권을 챙기기 위해 건너왔지만 초창기에는 야마구치현 사람들의 독무대였다.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을 보면 한일병합 때인 1910년 당시 일본 거류민은 17만1천543명이었다. 그 중 야마구치현이 고향인 일본인은 2만990명이나 됐고 전체의 12.2%를 차지했다. 경성과 부산에는 야마구치현 출신이 제일 많았고 광복 때까지 그 추세가 지속됐다. 아무리 거리가 가깝고 부산∼시모노세키 간 연락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47개 광역단체 중 인구면에서 중간 정도에 불과한 야마구치현 출신들로선 너무나 많은 숫자였다.
당시 야마구치현(조슈번) 출신들이 일본 정계와 군부의 주도세력이었고 조선 침략의 선봉장인 점을 감안할 때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한일병합 전후 조선통감·총독과 조선주차군사령관, 총독부 주요 관리는 모두 야마구치현 출신이었다. 이성환 계명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국 사람은 외지에 나가면 같은 학교 출신을 찾지만 일본인들은 같은 고향사람을 먼저 찾는다"며 "조슈 '번벌'(藩閥)이라고 불리던 야마구치현 출신들이 앞장서 조선을 병합시켰기에 그 전리품의 많은 부분이 동향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하층민이 많았고, 한반도와 한국인을 먹이로 삼으려는 의식이 강했다. 일본 정부가 주도해 민간인을 대거 이주시켜놓고는 한반도를 맘껏 수탈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육군대장과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894년 청일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급한 것은 부산에서 의주까지 철도를 부설하고, 중요한 지점마다 일본인을 이식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침략은 결코 총칼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히려 이름 모르는 일본인들의 '풀뿌리 침략'이 더 무섭고 위력적이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박병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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