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이 내게로 온 것은 2007년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포인세티아, 일명 크리스마스 꽃, 얼핏 풀꽃처럼 보이지만 중앙아메리카의 어디 숲에선 3m도 넘게 자란다는 어엿한 관목, 왠지 키우기는 까다롭고 그냥 눈요깃거리쯤 되는 꽃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던 식물이다.
녀석은 그런 선입견을 깨고 쑥쑥 자라 이제는 제법 나무 티가 날 정도로 커졌다. 그동안 내가 해주었던 것이라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두고 이따금 물을 주는 일뿐이었다.
녀석이 내게 오기 얼마 전, 진료실을 찾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훤칠한 키에 눈이 사슴처럼 맑았던 사람, 꽤 깊이 진행된 위암이 발견되었지만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젊었던 사람이었다.
결과를 가늠하기 어려운 대수술을 받으러 가기 전 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내 편에 들려서 보내온 것이 바로 녀석이었다. 위 전부를 잘라내고 암세포가 먹어들어간 비장과 대장의 일부, 그리고 주변의 임파선까지 샅샅이 색출해내는 무시무시한 전투를 그가 견디는 동안, 전투 후에 엄습하는 피로와 이유도 모를 발열과 감염이라는 내부의 적과 다시 싸우는 동안 녀석은 마치 그 치열한 싸움에 동행하듯 묵묵하게 견뎌냈다. 그 겨울을 지나 이듬해까지 녀석은 크리스마스 꽃이란 별명이 무색하게 온통 시퍼런 잎사귀들뿐이었다.
녀석이 그렇게 견디는 동안, 그는 말기 암환자라고 말해주기 전에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잘 먹고 잘 웃고 가족들과 주변 친지며 친구들을 다독거리면서 활달하게 지냈다. 심지어는 주치의였던 내게 와서도 다 괜찮을 거라고 어깨 툭툭 두드려주고 갔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두 번째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급작스러운 복막 전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죽어가는 자신보다는 남아서 슬픔을 견뎌야 할 사람들을 더 안타까워했다. 그가 떠난 그해 겨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크리스마스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이다. 고집스럽게 푸른 잎만 내밀던 녀석이 여기저기 붉은 포를 펼치고 그 붉은 포 가운데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샛노란 꽃들을 올망졸망 피워 올리는 것이었다. 그 신기한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문득 그의 아내가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다음 날이 그의 첫 번째 제일이라고 했다. 사람은 가고 없는데 그와 관련된 무엇인가 가만히 곁에 와서 앉아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수화기를 놓고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녀석은 그 붉은 포들을 어떤 기다림이나 희망의 징표처럼 한여름 지나는 지금까지도 다문다문 펼쳐내고 있다. 덕분에 2010년은 날마다 크리스마스 같았다. 이제 뜨겁던 8월도 갔으니 조금은 선선해질 9월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려본다.
원태경<내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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