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낙동강시대-스토리가 흐르는 마을] (12)상주 도남마을<1>

서원으로 반상 갈리고, 신앙두고 헤어졌다…"그래도 우린 한마을 주민"

자연이나 인간에게 변화는 늘 갈등과 조화를 동반한다. 대립이나 갈등 없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어렵고, 변화는 소수(량) 또는 다수(량)의 조화와 합의를 통해 완성될 수 있다. 반면 합의가 일방(독단)적이거나 부적절하게 이뤄질 때 또 다른 갈등은 불가피하고, 새로운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낙동강도 지형과 지류의 크기나 모양에 따라 물길이 부닥치고 흐름이 세지고 느려진다.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는 두 물살이 부딪쳐 빠르게 흐르는 여울과 깊이 파인 소(沼)를 만든다. 댐과 보(洑)는 물길의 흐름과 강도를 바꿔 새로운 습지나 하중도(河中島)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낙동강 사업을 통한 대규모 준설과 보 건설이 물길과 강 생태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강마을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류도 늘 갈등과 대립을 겪어왔다. 예부터 물질과 자본, 영토, 지배이데올로기와 권력을 향한 욕망은 개인이나 집단, 국가 간 갈등의 주 요인이었다. 고대 삼한부터 현재까지 시대 변화나 왕조의 변천, 당파싸움, 계층(급) 갈등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 갈등은 일정 방향의 합의나 강제성에 의해 변화를 가져왔다.

태백에서 발원한 뒤 소백산 내성천과 죽월산 금천의 물길을 모아 삼강에 다다른 낙동강은 상주 사벌면에서 속리산 영강을 또 품는다. 강물은 더 넓은 품으로 흘러 낙동강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의 하나로 꼽히는 상주 경천대의 절벽을 더 깎아내린다. 경천교와 자전거박물관 예정지를 지나 왼쪽 비봉산과 오른쪽 서원산을 양 날개처럼 펼치고 흘러내린다. 강물은 여기서 호흡을 고른다. 비봉산과 서원산 사이로 흐르는 낙동강 중앙에 하중도인 오리섬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상주시 도남동 도남마을은 바로 오리섬이 물길을 양 갈래로 만들어놓은 낙동강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강에 인접한 도남서원이 맞은편 비봉산 중턱 청룡사를 바라보고 있는 형세다. 북쪽과 서쪽으로 사벌면과 접하고, 남서쪽으로는 병성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상주 도남마을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갈등, 변화가 응축된 마을이다. 서원과 마을, 산신제와 예배, 교회와 교회, 오리섬과 굴삭기(낙동강사업) 등이 묘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서원과 낙강시제, 그리고 마을

도남서원은 도남마을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마을 이름도 서원의 이름을 따 '도남', 서원이 있다고 '서원마'로도 불렸다. 마을 동쪽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는 영남 최대 규모 서원이다. 1606년(선조 39년)부터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고, 이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제를 매년 올리고 있다. 이후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등을 추가로 배향하고 있다. 도감과 원장, 7인의 유사를 두고 상주, 문경, 예천 등 3개 시군의 유림 700여 명이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지금도 매년 음력 2월과 8월 모두 익히지 않은 음식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김태윤(64) 씨는 "원래 재실이 아흔아홉 칸까지 있었는데, 불도 몇 번 나고 뒤에 조금씩 축소됐다 대원군 때 철폐돼 없어졌지. 유림들이 1992년도부터 새로 복원했는데 영남에서는 제일 크고 대표적이어서 영남 수석서원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도남서원에서는 선조들에 대한 제와 함께 2002년부터 '낙강시제'를 재현하고 있다. 낙강시제는 상주 낙동강 일대(사벌면 퇴강리~경천대~간수로 구간 40리)에서 열어온 전통 시회(詩會)다. 옛 선비들의 시 사랑 정신과 풍류를 계승하는 문학행사인 셈이다. 고려 명종 26년(1196년) 백운 이규보로부터 조선 철종 13년(1862년) 계당 류주목의 시회에 이르기까지 666년 동안 도남서원과 경천대, 선상 등지에서 모두 51회에 걸쳐 치러졌다. 2002년부터 다시 시제를 재현, 올해로 60회를 맞았다.

도남서원은 이처럼 선조들의 위업을 추모하고 문학의 향을 이어온 유서 깊은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신분차별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서원은 양반 유림과 마을 평민들을 갈라놓는 가림막으로도 기능한 것이다.

"저(서원) 모인 사람들은 양반이라고 하고, 마을에는 뭐 일반 평민이거든. 어진 사람은 안 그러는데 나쁜 사람도 있거든. 심부름도 시키고 뭐 잘못되면 꿇어앉혀 놓고 벌을 주고 그랬다고. 낙동강에서 안동으로 올라가는 소금배도 서원 앞을 지날 때는 돛을 내려야 해. 돛을 달아야 바람을 받아 사공이 힘 안 들이고 올라갈 수 있거든. 서원 앞을 지날 때 돛을 안 내리면 '무엄한 놈'이라 카며 불러다가 곤장을 팼는기라."

김정배(76) 씨는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유림들에게 땅을 뺏긴 적도 있다"며 "마을에는 유림에 가담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서원 일에 관여하지 않고 출입도 하지 않는다"고 옛 서원 유림의 횡포를 꼬집었다.

도남서원은 그렇게 마을의 대표적 상징이기도 하고, 마을사람들의 감성과 분리된 별개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산신제와 교회

도남 사람들은 약 50년 전까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렸다. 마을 북쪽을 감싸는 야트막한 서원산 봉우리에는 지금도 산신제를 모시던 흔적이 2곳 남아있다. 금강송 묘목으로 조림을 한 산봉우리 한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10그루가 우뚝 솟아 둥그러니 원형을 그리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 부정을 타지 않은 사람을 제관(제주)으로 뽑아 날을 정했다. 제관은 3일 동안 기도를 하며 궂은일을 보지 않고,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지 않고, 부부 간 동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월 초하루 찬물에 목욕재계한 뒤 음식을 장만해 산신제를 지냈다는 것.

김수동(53) 씨는 "내 어릴 때까지 산신제를 지냈는데, 여자들은 제사에 참석할 수가 없었어. 또 산신제 지낸 음식을 먹으면 충격을 받아 죽는다고 하는 바람에 산제 지낸 음식은 산에서 가지고 내려오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산신제는 1950년 6·25 직후 교회가 들어서고 몇 년 뒤 사라졌다. 교회에 사람들의 신망을 받는 목사가 들어오면서 마을 사람들은 하나 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목사는 차가 귀하던 시절 자기 소유의 봉고차 한 대를 마을을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새벽이라도 달려가 봉고차로 병원으로 옮겼고, 한여름 마을 사람들이 논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미숫가루에 얼음을 띄워 돌리기도 했다는 것.

유복순(67) 씨는 "옛날에 참 유명한 목사가 왔었어. 마을 일에 봉사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도 잘하니 신임이 두터웠어. 그 목사님이 산제를 뜯어 없앴어. 그래도 고마 아무 탈도 안 나데"라고 했다.

산신제라는 세시풍속을 통해 하나로 묶였던 마을은 다시 교회라는 테두리를 통해 새롭게 뭉쳤다. 하지만 도남마을에 교파를 달리하는 교회가 둘이 서면서 주민들까지 둘로 갈리게 됐다. 마을 중앙 논밭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각각 60년, 40년 된 교회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한 주민은 "교회를 하나로 합해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며 "마을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주민들이 하나로 뭉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도남마을은 이렇게 서원 유림과 마을주민 간, 두 교회 간 화합과 통합의 숙제를 안고 있다. 새로운 변화를 앞둔 대립과 갈등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최화성 ▷사진 천재성 ▷지도 일러스트 임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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