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할머니Ⅰ

늘 목욕시켜드리는 손녀가 예뻣던지 "내 반지 너한테 주마"

♥목욕시켜 드린 내가 사랑 독차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계신 젖가슴이 유난히 예뻤던 나의 할머니. 자그마한 키에 약간 통통하고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지셨던 할머니는 예쁜 얼굴이셨다.

거기에다 성격 또한 상당하셨던지라 고부 갈등이 아닌 모자 갈등으로 인해 아버지와의 언쟁을 종종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던 할머니. 그래도 부모님과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께 깍듯하게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께서는 부모님이 농사일로 바쁘시니 나에게 많이 의지하셨던 것 같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면도 있었지만 일을 겁내지 않고 나서서 하는 내가 대하기가 편하셨던가 보다. 부모님과 할머니 심부름은 항상 내가 도맡아 했고 주말이면 할머니 목욕시켜 드리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30여 년 전 시골에 요즘 주택 같은 욕조 딸린 화장실이 어디 있으며 목욕탕까지는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야 하는데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돈이 문제였던 시절이었다. 큰 가마솥에 가득 물을 붓고 장작불로 물을 끓여 커다란 고무 통을 방에 갖다놓고 할머니 목욕을 시켜 드리는 일은 어린 나이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했던 것 같다. 불평불만 없이 구석구석 씻어주는 손녀가 내심 고맙고 편하셨던지 돌아가실 때까지 다른 손녀들에게 절대 부탁하지 않으셔서 덕분에 그 일은 언제나 내 몫이 되어 버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집을 떠나 직장에 다녔는데 집에 간다고 연락만 하면 미리 대문 밖에 나오셔서 나를 기다리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해주신 유일한 반지를 돌아가시면 내게 주마고 하신 할머니. 나는 그런 할머니를 절대 잊지 못한다.

할머니 돌아가신 이후부터 나는 목욕탕에 가거나 수영장에서도 나이 드신 할머니들이 혼자 씻고 계시는 걸 보면 꼭 등이라도 밀어 드리고 나와야 마음이 편해진다. 부적처럼 간직하는 할머니의 반지는 할머니께서 항상 내 곁에 함께하시고 내 기억 속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살아있게 만든다. 오늘도 지팡이 짚고 대문 밖에 나와 앉아서 집에 온다는 손녀를 기다리시던 나의 할머니가 너무 그립다.

김성숙(대구 달서구 용산2동)

♥ '1974년 지폐' 아직도 보관

할머니는 할머닌데 왜 요즘 할머니와 옛날 할머니로 구분해야 할까? 나의 모친은 요즘 할머니다. 갑자기 일이 생겨 아이를 좀 맡기려고 하면 엄마의 스케줄에 따라 빈 시간이 없으면 절대로 봐주시지 않는다. 처음엔 야속하고 많이 섭섭했다. 그러나 엄마는 인생을 송두리째 우리 여섯을 키우는 데 다 바쳤고, 공부시켜 어느 누구 하나 몸 다친 데 없도록 잘 키워 결혼시켜 주었다며 당당하시다. 그리고 칠십이 넘어서까지 손자들 때문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다고 애초에 선언하셨다. 각자의 자녀는 알아서 키우고 교육시킬 것이며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말고 부담주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처음엔 호응을 했지만 살다 보니 아이가 아프기도 하고 출장으로 집을 비워야 할 때도 많은데 엄마가 독립적인 생활을 선언하고부터 섣불리 부탁할 수 없는 처지가 되다 보니 이모, 고모댁으로 가야 하는 아이들만 고생이었다.

할 수 없이 형제들끼리 상부상조하며 서로 아이를 돌봐주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에 대한 아이들의 애정과 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애틋함이 내 어릴 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나를 '물고 빨고'(?)하면서 손수 키우셨다. 장손이라고 얼마나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셨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우리 강아지 왔나? 공부하느라고 고생 많았지?' 하며 마당까지 맨발로 달려와 반겨주시곤 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아 미안하지만 너 군에 갈 때까지만 살다가 죽을게' 그리고 '네가 예쁜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도 보고 싶지만' 하셨던 할머니다. 결국 고3 때 돌아가셨지만 할머니의 고쟁이 바지 안에는 지린내 나는 꼬깃꼬깃한 지폐가 들어 있었는데 엄마가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너, 군대 갈 때 줄 거라고 모은다고 하시더니.'

벌써 제대한 지 20년이 가까워 오는데 일기장 갈피 속에 있는 1974년 발행된 지폐에서는 할머니의 향기가 솔솔 난다.

문성권(대구 수성구 지산동)

♥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래이"

10월 나른한 주말 오후. 기숙사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 벨이 울렸다. 룸메이트 동생이 전화를 받더니 "언니! 택배 왔다는데요. 지금 신분증 가지고 2층으로 오래요." "어, 그래? 누가 보냈지? 요즘 인터넷으로 책 주문한 것도 없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내내 무슨 택배일까? 누가 보냈지? 이런 궁금증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층에 도착하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박스가 보였다. 분명히 '청도 반시'라고 쓰여 있었다. 너무나 큰 상자를 받고 나니 어안이 벙벙해져서 겨우 들고 방까지 올라왔다. 감 박스를 뜯었더니 너무 예쁜 주홍색의, 가을빛을 닮은 홍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홍시를 보자 고향에 계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래서 휴대폰을 열고 할머니와 통화했다. "아이고, 우리 선경이가? 어떻게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했노?" "어, 저, 네, 할머니. 저기 감 잘 받았어요. 이렇게 택배까지 보내 주시고 잘 먹을게요. 요즘 잘 지내고 계세요?" "어, 그래 나는 잘 지낸다. 감 괜찮더나? 어디 터지거나 상한 데는 없구?" "네, 너무 맛있겠는데요." "올해는 감 농사가 잘 안 돼서, 그래도 니한테 보내는 것은 제일 좋은 감만 골라 부쳤데이~ 그래. 주변에 친구들하고, 선배들하고도 나눠 먹어라. 알았제?" "네, 할머니. 너무 일만 하시진 마세요. 저는 열심히 할게요"

이렇게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한 게 정말 얼마 만인가? 한두 달에 한 번씩 집에 내려가면 내 할 일이 많아 시간에 쫓겨 올라오기 바빠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손녀를 위해서 올해 당신이 지으신 농산물 가운데 최고를 부쳐주신 할머니께 내가 해드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에 너무 미안해졌다.

푸른 하늘에 어느덧 늦가을임을 알리는 낙엽들, 은행잎과 단풍잎이 나를 재촉한다. 다시 난 휴대폰을 켠다. 그리고 할머니께 안부 인사를 전한다. "할머니! 내년에도 맛있는 홍시 맘껏 먹을 수 있게 오래도록 건강하셔야 돼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현선경(청도군 이서면 학산2리)

♥ "오래오래 발톱 깎아 드릴게요"

주말마다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짠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연로하신 아버지와 더 연로하신 할머니 두 분이서 끼니 끓여 잡수시고 농사일을 하시는 걸 보면 마음이 짠하고, 시험공부에 열중해야 할 중학생 아들과 딸에게 공부할 시간 뺏는 것 같아 미안하고, 항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 아내에게 제일 미안하다.

아이들 뒷바라지도 힘든데 고향에 가면 할머니를 읍내 목욕탕으로 모셔가 목욕 시켜 드리고 시골 집 청소며 농사일까지 거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에게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내가 장손이고 장남이고 남편이며 아빠라서가 아니라 모두가 소중한 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목욕하고 돌아와 나에게 발을 내미셨다.

"눈이 침침해서 영 보이지가 않아" 하시며 내민 앙상한 발등은 정말이지 뼈에 껍질만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할머니 발을 만지작거리며 92년 동안 할머니의 몸을 지탱해주었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났다.

허옇게 두툼해진 발톱을 손톱깎이로는 잘라지지 않아 할 수 없이 작은 전지가위로 발톱을 뜯어냈다. 발톱 무좀으로 두꺼워진 허연 발톱가루가 신문지 위로 떨어져 나가자 할머니는 "내가 깎아보려고 해도 당최 말을 들어야지" 하시며 손톱깎이를 나무라는 것이다. 그처럼 시력이 좋지 않은데 어떻게 밥을 해 드시는지 생각하니 또 마음이 짠하다.

아내가 밥을 지어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데 "아가. 네가 밥을 하니 고소한 냄새가 나는데 내가 하면 와 그럴꼬?" 하시며 맛있게 드셨다. 30여 년 동안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신 할머니,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양일용(대구 달서구 용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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