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집안은 선대부터 무인(武人)이 많았다. 또한 보수적 기질이 강한 편이었으나 때때로 엉뚱한 인물이 태어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시대 박은과 박문수를 들 수 있다. 또한 고조부'증조부'조부대까지는 독손(獨孫)으로 내려오다가 그의 아버지대에 이르러 3형제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청년 시절 무과(武科)에 급제해 뜻을 펴 보고자 하였으나 나라의 기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고, 1892년 성주에서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동학의 접주가 되었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금오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령 박씨 성빈(1871~1938)과 어머니 수원 백씨 남의(1872~1949)의 5남 2녀 가운데 다섯째 아들이다. 위로는 동희'무희'귀희'상희'한생'재희가 있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두 형 동희와 무희는 결혼하여 자녀가 있었으며, 은씨 집안으로 시집간 큰누나 귀희는 임신 중이었다.
어머니 백남의는 마흔다섯의 나이로 박정희를 임신하였기 때문에 바라지 않던 자식이었다. 누나인 박귀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두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가 있었던데다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으며, 또한 집안이 가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이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심지어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지기도 했으나, 배속의 아이는 여전히 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며 아이 지우는 일을 포기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그 같은 우여곡절 끝에 태어났다. 그런가 하면 배속에서 겪은 시련 때문인지, 아버지와 형들의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상모동은 1910년대의 우리네 농촌을 그대로 상징하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박정희의 집안은 4천800㎡(1천600평) 정도의 외가 땅을 소작하면서 그런대로 양식은 해결되었다. 또한 그의 형들이 성장하여 농사를 돕게 되니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안일에 무관심하였을 뿐 아니라 출타하는 경우가 많아서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어머니의 고생이 만만찮았다. 더욱이 일곱 남매의 자식들을 키우느라 무척 힘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셋째인 상희를 구미보통학교에 넣어 공부를 시켰는데, 그 당시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그뿐이었다. 그 뒤 박정희가 보통학교에 입학했을 때 마을에서 보통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모두 셋뿐이었다.
박정희는 1926년 4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0리 길이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지각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닿기란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늦다고 생각되면 거의 뛰다시피 했다. 마을에 시계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시간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도중에 만나는 우편배달부나 경부선 기차를 만나는 지점에 따라 시간의 빠르고 늦은 것을 짐작하였다. 그러다가 열차 시간표가 변경되면 착오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러나 봄가을에는 길가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상쾌한 마음으로 다녔다. 그렇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고생이 심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책가방을 허리에 동여매고 삿갓을 쓰고 다녔다. 아랫도리 바지는 둥둥 걷어 올려야 했고, 학교에 가면 책이 빗물에 젖어 있기 일쑤였다. 겨울에는 솜 바지저고리에 솜버선을 신고, 목도리와 귀걸이를 하고 눈만 뻐끔하게 내놓고 다녔다. 땅바닥이 얼어서 빙판이 되면 열두 번도 더 넘어졌고, 어쩌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길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곡마을 뒤 솔밭 길은 나무가 우거지고 가끔 늑대가 나온다고 해서 혼자는 다니지를 못했다.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급장을 맡았다. 그 시절 담임 선생은 박정희에 대해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역사'지리 과목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뛰어나고 자습시간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시간에는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 한다'고 평가했다.
1932년 3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진학을 포기하기를 은근히 바랐는가 하면, 그의 어머니는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합격하고도 진학을 하지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통학교의 교장 선생과 담임 선생이 그의 부모를 설득하여 응시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마침내 합격하였고, 입학 성적은 100명 가운데 51등이었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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