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신선이 사는 500년 역사의 양동마을

내가 태어난 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이다. 역사상 수많은 명신과 현관(顯官), 석학을 배출한 양동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양동의 옛 이름은 안강읍에서 안쪽에 있는 골이라고 하여 '안골'이라고 불렀다. 안골의 모양은 소쿠리 모양으로 입구는 좁고 들어가면 아주 넓다. 안골은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서남으로 휘둘러 안고 흘러 마을 입구까지 물이 차 있어서 인간은 쉽게 정착을 못했다. 인간이 살지 않으니 전국의 신선(神仙)들이 여기 와서 항상 놀았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장(場)이 아닌 자연의 장이 되었다. 마을의 터줏대감은 양(良)이라는 성(姓)을 가진 신선 3형제였다.

신선들은 가끔 인간의 세계를 동경했다. 신선 3형제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안골에는 가끔 몰락한 가문들이 숨어들어와 살다가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이유는 신선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500년 전 풍덕 유씨가 정착을 하려고 또 들어왔다. 마을에는 푸른 대나무가 많았다. 곧고 강직한 대나무처럼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가문이 되게 해달라고 '대청골'(垈靑骨)이라고 불렀다. 신선들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그때 놀러온 한 신선이 자기 영역 안에 있는 스님 한 분을 3형제에게 추천했다. 신선들도 인간처럼 자기만의 영역이 있었다. 이 스님은 경주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첩첩산중에 있는 성불암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름은 세선(世仙)이었다. 세선 스님은 인간의 몸에 대해서 훤히 알아 불치병 환자들에게는 생명수였다. 그래서 세선도사라고 불렸다.

어느 날 세선도사가 포항으로 가기 위하여 경주에서 배를 탔다. 교통수단으로 형산강을 따라 다니는 배가 있었다. 신선 3형제는 배가 안골을 지날 무렵 갑자기 풍파가 일게 했다. 배는 뒤집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곳이 안골 입구였다.

마을로 올라갔다. 언덕배기 빈 공터에서 웬 여식이 세선도사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물에 빠져 생쥐 꼴인 스님 모습이 딱했는지 옷을 말려 가라고 했다. 6월 하순이라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너무 따뜻한 여식의 말에 감동을 받아서 따라갔다. 여식은 부모님이 일을 가셨다면서 정중하게 아버지의 성함은 '유 자, 복 자, 하 자'라고 했다. 세선도사는 첫눈에 참 영리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아버지가 왔을 때 그 여식은 자초지종 얘기를 했다. 이상하게도 유복하와 금세 친근감이 느껴졌다. 세선도사는 정성이 깃든 초라한 저녁상을 받았다. 스님은 단숨에 밥 한 그릇을 비웠다. 자연스럽게 주거니 받거니 긴 얘기가 이어졌다. 유복하는 아들이 없었다. 세선도사는 늦게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이 마을을 지키는 양(良)이란 이름을 가진 신선이다. 내가 너를 오늘 여기에 오게 했다. 이 마을은 성스럽고 경사스러운 곳이다. 앞으로 위인이 3명이 날 것이다. 여식을 만난 빈 공터에 집을 지어라." 세선도사는 너무 놀라 잠이 깼다. 신선이 일러준 빈 공터로 나갔다. 절을 하면서 "경사스런 땅"이라고 몇 번 외쳤다. 세선도사는 신선이 가르쳐 준 대로 "위인(偉人)을 얻는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양자(良子)라고 지었다.

안골마을 손씨의 입향조는 경주 손씨 손소(1433~1484)이다. 경주 손씨는 오래전부터 경주에 살았다. 손소의 아버지 손사성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할 만큼 학식이 높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고향인 경주 밤막골에 낙향했다. 지금의 경주 IC 근처이다. 성불암은 이 마을에서 약 2㎞ 정도 떨어져 있었다. 손사성은 성불암에서 치료를 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친해졌다. 세선도사는 안골에서 겪은 일들을 얘기했다. 특히 그 여식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손사성은 자기 아들 손소를 그 여식에게 소개해 주기를 부탁했다.

손소는 여식과 결혼을 하면서 "모든 자연은 음양(陰陽)의 이치로 이루어져 있다. 음은 여자요 양은 남자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우주 질서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것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몸이 되는 것이다. 음양의 조화가 극에 달할 때 위인을 낳는다"고 깨달았다. 그것은 신선의 뜻이었다. 손소 부부는 첫날 밤을 세선도사가 꿈을 꾸었다는 방에서 보냈다. 그 이후 신선이 점지해준 빈 공터에 집을 지었다. 그 집이 지금 양동마을 건축의 시발점이자 끝점이라는 가장 유서 깊은 건물 서백당이다. 그때 손소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그 이후 서백당에서 살았다. 손소는 서백당에서 공부를 하여 26살에(145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등용되었다. 1476년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을 얻어 안골로 내려왔다. 손소는 2남 1녀를 두었다. 그 중 한명이 손중돈이다. 손소의 딸은 이언적을 낳았다. 신선 3형제 중 막내는 손중돈으로 둘째는 이언적이란 위인으로 태어났다. 한명은 언제쯤 태어날까? 손소는 마을 이름을 양자(良子)로 바꾸었다. 1987년 양자에서 양동으로 또 바뀌었다. 현재 손소와 손중돈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은 옛날 유복하의 집 자리이다. 현재 서백당에는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도 이런 사연을 적어 놓은 데가 한 군데도 없다. 다만 구전으로 전할 뿐이다. 내가 교육현장에서 성교육의 전문가가 된 것은 아마 신선의 영향인 것 같다.

이원수

대구 성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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