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제23회 每日 한글백일장 당선작] 고등부 산문 장원-신종혁

'가을빛'

매일신문사 중부지역본부가 제564돌 한글날을 맞아 지난달 9~31일까지 주관한 '제23회 매일 한글 글짓기 공모전'에는 운문 608점, 산문 196점 등 총 804점의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응모해 모두 88편이 당선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가을 빛' '하늘' '마음' '강가에서' '창(窓)' 등 운문·산문 공통 글제로 치러진 이번 공모전은 전체 대상(1명)과 각 부문별 장원(1명), 차상(2명), 차하(3명), 장려(5명)상이 선정됐습니다.

달력이 얼마나 넘어가도, 시간이 아무리 지나간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을빛이 나야 우리는 가을이 왔음을 비로소 느낀다. 구체적으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그 시간들을 가을이라고 느끼게 하는 가을빛이라는 것이 있다. 땅을 꾹꾹 누르던 하늘이 탁 트여 높아지는 것도 그렇고, 슬금슬금 불어오던 끈적끈적하던 바람이 통쾌하게 들판을 내달리는 모습도 분명 가을만의 변화이다. 그러나 진정한 가을빛은 외부가 아닌 우리의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나오는 것이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 말이다.

가을빛은 따스한 소멸이다. 새로운 생명이 여기저기서 태어나 정신이 없는 봄을 지나, 날카로운 햇빛을 내리쬐던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그리고 우리는 소멸이라는 가을빛을 느낀다. 가을빛으로서의 소멸은 결코 차갑거나 슬픈 소멸이 아니다. 오히려 따스하고 유쾌한 다음을 기약하는 자발적인 소멸이다. 세상은 이제껏 가꾸어온 것들의 화려함을 세상에 당당히 드러내고 그 화려함이 과하여 천박해지기 전에 제 스스로의 손으로 거둔다. 나무도 일 년을 기다려 열매를 맺고, 스스로 그 열매를 땅에 떨어뜨리고 내년을 기약한다.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만들고 가꾸어 온 것들이라고 해도, 아무리 아깝고 서운해도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그것들을 거두어야만 한다. 지체하여 시간을 넘겨버려 겨울의 냉혹한 삭풍이 그것들을 말리고 얼려버리기 전에, 아직 아름다울 때 그만두어야 한다. 구차해지고, 지루해지기 전에 그래야 한다. 그렇게 아쉬움을 느껴야 우리는 다시 무언가를 가꿀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것이다.

가을빛은 맑은 공허함이다. 이제껏 우리의 마음속에 있던 것이 가을이 되어 아름답게 소멸하여도, 그 빈자리는 크게 느껴진다. 오랫동안 쏟아오던 애정과 관심을 받을 대상은 사라졌지만 관심은 계속 남아서 빈 공간에서 맴돌다가 이내 공허함으로 바뀐다. 그러나 꽉 찬 공간에는 새로운 무언가를 더 넣을 수 없다. 공간이 비어 있어야 새로운 것이 시작될 수 있다. 다른 것을 시작하기 위해 비워진 공간에 가득 찬 공허는 생명력이 가득한 흙과 같다. 다시 관심을 쏟을 존재를 더욱 갈망하기 때문에 무언가가 심어진다면 금세 공허는 좋은 비료가 된다. 아직 마르지 않은 관심과 애정이 더해지면 금세 새로운 기쁨이 가슴속에 자라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빈 공간에 들어갈 무언가가-연인이건, 이루고픈 목표건-너무 늦어 버린다면 안 된다. 겨울이 다가오고, 시간이 너무 지나버리면 가슴속이 차갑게 얼어붙어 아무런 것도 시작할 수 없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날 수가 없는 것이다.

가을빛은 성숙이다. 신체의 성숙은 언제든지 사시사철 진행되지만, 우리의 가슴속의 성장은 오직 가을빛을 띠는 동안에만 자란다. 놓아야 하는 것은 놓아 보내주고,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거칠수록 모루 위의 강철처럼 점차로 우리의 마음은 점점 깊어지고 맑아진다. 넓어진 마음에선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에 대한 배려와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성숙이라는 가을빛은 결코 쉽지 않다. 오히려 어떤 가을빛보다 험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 성숙해지기 위해선 길고 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며, 때로는 상처마저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천히 천천히 모든 고통들을 인내하고 마음에 새겨진 그 흔적들이 아프지 않게 될 무렵에 우리는 스스로가 성숙해졌음을 느낀다. 또 우리는 따로 성숙이라는 관문이 있는 것이 아닌, 이제껏 견뎌온 그 시간들이 모두 모여 성숙이라는 이름이 된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이렇게 가을빛은 다시 우리 맘을 물들이고 사라진다. 전과는 조금 더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남기고 천천히 바래어간다. 이번에도 상처가 하나 더 생겼다. 또 내가 가꾼 것을 내손으로 거두었다. 그리고 조금 더 깊어졌다. 자꾸 늘어만 가는 상처들의 깊이만큼 우리의 마음도 점점 깊고 넓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아프고 힘들지만 다시 가을빛이 우리를 물들여 주기를 기다리며 한 해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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