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달청 우수제품 인증받았어요" ㈜라이트제림

"배전반은 우리가 최고"

㈜라이트제림 배전반은 대구경북에서 처음으로 조달청 우수제품으로 인증받는 등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라이트제림 배전반은 대구경북에서 처음으로 조달청 우수제품으로 인증받는 등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김태진 대표
김태진 대표

'죽었구나' 짧은 외마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깨어보니 경북대병원 중환자실. 얼마나 잤는지(의식이 없었는지) 모른다. 결혼을 약속한 친구가 다리를 주무르다 잠들었나 보다. 사방이 고요하다. 절망감이 엄습했다. 고압선로 작업을 위해 사다리를 탔고 그 뒤로는 생각나지 않는다. 당시 나이 28세.

◆죽음의 문턱을 넘다.

24일 오전 대구 달서구 월성동 회사 사무실에서 만난 김태진(46) ㈜라이트제림 대표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다. 1991년 고령군 쌍림면 일대 고압선로 작업 차 사다리에 올랐다 2만2천 볼트 고압선에 감전됐다. 항상 남들보다 부지런하고 일에 대한 꾀를 부리지 않아 당한 봉변이다. 사고가 있던 날도 선배들을 쉬게 하고 뒷정리를 위해 전봇대에 오른 게 신체장애 2급이란 멍에가 돼 돌아왔다. 모자창이 고압선에 닿은 것이다. 아직까지 그때의 훈장은 불편한 다리에 남아 있다. "1년을 꼼짝없이 누워만 있었어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앞에서 아내 강숙자(43) 씨가 가장 큰 힘이 됐다. "재활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아내는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의리가 었었죠." 다시 힘을 냈다. 재활 끝에 정상인 못지않은 몸 상태로 되돌렸다. 다시 일터로 복귀했다. 목숨을 뺏길뻔했던 배전 일이라 아내가 펄쩍 뛰었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었다. 전기공사면허를 가지고 있은 데다 무엇보다 자신이 있었다.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아내와 굳게 약속했고 1995년 배전반을 만드는 회사를 차렸다. "죽다 살아났는데… 또 죽으란 법은 없나봐요." 2년 뒤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 혹한은 오히려 기회였다. 도산한 기업의 배전시설을 헐값에 사들였고 새것처럼 고쳐 싼 가격에 되팔았다. 3만3천㎡ 공장도 커버할 수 있는 5천kW 배전반도 갖추고 있었다. 신뢰 경영이 무기였다. "사람을 믿어야지. 안 그럼 누굴 믿나요?" 직원들을 가족처럼 믿었고 금융권, 업체 등에게도 차곡차곡 믿음을 쌓았다. 서울지사는 물론 최근에는 공장을 확장 이전했다. 경북 군위군 수서리 수서논공단지에 4천480㎡ 규모 새 공장을 마련한 것. 이와 함께 기계 라인을 교체했고 도색라인도 갖춰 원스톱 배전반 공정 인프라를 구축했다. 김 대표는 "기술은 우리도 뛰어난 데 기계 설비가 서울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며 "설비분야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뚝이 경영

어음이 책상머리에 5cm 이상 쌓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김 대표는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2001년 초 경북 칠곡군 동명면 1천680㎡ 부지에 공장을 세웠고 2003년 부도가 났다. "말 그대로 빚이 산더미였어요." 생돈 10억원을 날렸다. 배전반 사업은 건설의 마지막 단계인 탓에 납품 기업 부도 등 사업 중간 중간에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언제 어떻게 돈을 떼일지 모른다. 김 대표는 "분명히 이번 배전기 설치 작업에선 공사비를 받지 못할 것 같지만 사업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많이도 떼였다. 특히 2004년에는 공사 면허까지 정리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신뢰는 든든한 후원자였고 다시 일어설 발판을 마련해 줬다. 금융권에서부터 지인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줬다. 열 번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고 오늘날 대구경북 최초로 라이트제림 배전기가 조달청 우수제품으로 인증받는 데까지 달려왔다. "아직도 빚잔치(?) 중이에요." 주위에서 아낌없이 도와준 이들, 대형 사고를 당하고도 믿고 곁을 지켜준 아내와 가족에게 갚아야 할 채무다.

◆남은 인생 가치는 5천억원?

초등학교 5학년 때 또래 중에서 가장 큰 부를 누렸다. 부모님 몰래 대구 수성구 수성못 주변에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대박을 쳤다. "그땐 수성못 외엔 데이트 장소가 없었어요. 연인들이 쉼 없이 몰려왔어요." 아이스크림 장사는 우연한 기회에 시작했다. 당시 운반책이었던 김 대표는 판매책이었던 동네형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수성못 아이스크림 상권을 장악(?)했다. 부모님께 걸리기 전까지 여름 한철 장사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그는 "현재 내 위치가 그 시절의 포지션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배전반 시장에 라이프제림이 우뚝 솟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아이스크림 장사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듯 배전반 사업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때 돈을 떼이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라이프제림은 없어요." 전기 탓에 죽을 뻔 했고 납품하던 공장이 부도가 나 돈 대신 공장 설비를 받았다. "전생에 무슨 인연인지 전기하고 떨어지질 않네요." 우연치 않은 기회에 사업을 맡았지만 가는 길이다 싶으면 옆을 돌아보지 않는 성격 때문에 배전반 사업에 승부를 걸었다. 밤늦도록 배전반에 대해 공부를 했고 현장을 누볐다. 사고가 있기 전까지 2년여 간 현장에서 동료들과 굵은 땀방울을 흘려본 터라 현장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현재 회사도 매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고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김 대표는 자신의 남은 인생 가치를 5천억원이라고 말했다. 동료들의 열정과 앞으로 펼쳐나갈 라이프제림 가능성을 합친 액수다. "기업가는 10원을 손해 보면 사업을 접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 같은 직원들과 그간 신뢰 경영을 바탕으로 일궈 온 라이트제림은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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