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역사·문화 인물] (12)악성 우륵

칼이 지배하던 삼국시대, 12현 화음으로 세상을 움직인 음악가

악성 우륵상 가야금을 연주하는 연주 모습
악성 우륵상 가야금을 연주하는 연주 모습
우륵박물관 전경
우륵박물관 전경
우륵 영정
우륵 영정

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리의 세계를 꽃피운 가야금의 창시자인 악성 우륵.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嘉實王) 때의 인물로 왕명에 의해 가야금 12곡을 지은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대가야는 서기 42년에서 562년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한 고대국가이다. 하지만 500년 이상 존속된 국가로 수많은 인물들이 활동했지만 후세에 알려진 인물은 우륵 말고는 별로 없다. 16대에 걸친 왕들의 이름조차도 다 전해지지 않는 형편이며, 다만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과 신라의 왕녀와 결혼한 이뇌왕, 우륵에게 가야금을 창제케 한 가실왕, 479년 중국 남제에 사신을 파견했던 하지왕, 대가야 마지막 도설지왕 등의 이름만 겨우 전해질 뿐이다. 대가야와 관련된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륵의 생애와 활동조차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수많은 학자들이 우륵의 생애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만 학자들 마다 우륵을 보는 시각은 천차만별이며, 출신지를 두고도 많은 지자체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우륵 출신지 성열현(省熱縣)에 대한 논란

우륵은 490년대 무렵 대가야의 성열현(省熱縣)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 우륵은 성열현(省熱縣)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열현이란 지명이 현재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 의견이 분분하다. 고령을 비롯해 경남 의령과 거창, 대구 동구, 충북 제천 등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성열현이 고령군 내 어느 지역이라고 보는 학자들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 곳이 어디가 됐던 분명한 것은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창제한 대가야 인물이다. 대가야의 가실왕이 성열현에 살던 우륵에게 명령해 왕도로 불러들인 것을 보면 성열현은 대가야 왕의 통치력이 미치고 있는 곳이다. 이 때문에 성열현이 의령·거창 이라면 대가야가 그 곳까지 지배력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대구나 충북이라면 대가야의 지배력이 더 넓은 범위까지 확대됐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논리로 보면 우륵이 어느 고장 출신인가에 따라 대가야의 직접적인 지배권역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구나 충북 지역이 대가야의 영역이나 문화권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의령·거창 지역 주장에 대해서도 '성열'이라는 발음과 비슷한 곳이라는 주장 외에는 설명이 안되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우륵이 자라난 성열현은 가야금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갖춘 곳으로 왕명이 직접 관철되는 대가야의 도읍인 고령 인근 지역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대가야 도성에서의 활동

우륵은 20대 후반인 520년대 전반쯤 가실왕의 부름을 받고 대가야의 도성으로 들어갔다. 이 때 대가야는 고대국가 단계로 발전하면서 지금의 경상남도 상당 지역과 전라도 여수·순천에 이르는 광범위한 권역을 차지했다. 그러나 섬진강 유역과 남해안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백제와의 경쟁에서 밀려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실왕은 우륵을 왕도로 불러 가야금을 창제토록 하고, 가야금 12곡을 작곡하게 했다. 국가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군대를 늘리거나 성을 쌓는 일이 더욱 시급했을 것 같은데 가실왕이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고 작곡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 악지(樂志)는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참조해 가야금을 만들었는데, 가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달라 소리음(聲音)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성열현(省熱縣) 출신의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곡 12곡을 작곡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음악을 통해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우륵으로 하여금 12곡을 작곡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오동나무로 제작해 명주실로 12개의 현을 만든 가야금의 형태가 위 판은 둥글고 아래 판은 평평한데 둥근 하늘과 평평한 땅을 본 딴 것이다. 아래 위 사이가 비어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공간을 의미하며, 12줄은 일 년 열두 달을 의미하며, 안쪽 높이가 3치(三寸)인 것은 천·지·인을 상징한다. 이처럼 가야금에는 대가야 사람들의 우주관과 시간관이 담겨져 있다. 하늘과 땅, 그 사이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이루는 조화와 균형이 가야금의 선율이 되는 셈이다.

가실왕이 대가야에 속한 여러 나라들의 말이 서로 달라 이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가야금과 곡을 만들게 했다. 고대사회에서 음악을 통한 통치는 형정예악(刑政禮樂)이라는 표현과 같이 유학(儒學)에서 국가와 사회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단계를 의미한다. 요즘 음악과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가야금의 창제는 가실왕과 우륵이 유교적인 예악(禮樂)사상을 통해 대가야 권역에 속한 각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정치적인 개혁을 이루려고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야금은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라는 좁은 의미보다 대가야 국가통합이라는 화합과 개혁의 의미를 담은 개혁정치를 위한 상징적인 조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물(上奇勿), 하기물(下奇勿),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등이다. 상가라도, 하가라도 등 10곡은 당시의 나라이름과 지명에서 따온 것이고, 보기와 사자기 2곡은 불교와 관련된 연주곡이다. 상가라도는 고령의 대가야, 하가라도는 김해의 금관가야, 사물은 사천, 하기물은 남원, 거열은 거창, 상기물은 임실 등으로 가실왕과 우륵이 가야금 12곡을 작곡해 이 지역을 대가야가 포용하는 '범 대가야연합'을 추구해 지역 통합과 정치적 개혁을 통해 기울어져 가는 국가를 재건하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망명기의 우륵

가실왕과 우륵의 개혁 정치는 대가야 내부세력의 반발과 신라의 영토 확장 욕구 등과 맞물려 점차 동력을 상실했다. 532년 금관가야의 멸망으로 가야를 지탱하던 대가야에 대한 신라의 공세가 더욱 심해졌다. 대가야 내부에서는 국가 존립을 위해 백제와 신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두고, 친 백제파와 친 신라파로 갈라져 내홍에 휩싸였고, 우륵은 친 신라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외교정책을 두고 양측 세력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친 백제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540년대 후반쯤 우륵은 가야금을 품에 안고 신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그의 행로는 순탄치 못했다.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로 갔지만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의 대치가 극심했던 변방의 국경지대인 충주 지역으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우륵은 가야금으로 진흥왕의 관심을 받게 됐다. 진흥왕이 보낸 계고(階古), 법지(法知), 만덕(萬德) 등 신라인 제자들에게 음악과 춤, 노래 등을 가르쳤다. 그 결과 우륵은 다시 경주로 돌아왔지만 신라 지배층으로 대우 받지는 못했다. 신라나 진흥왕은 대가야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작곡했던 우륵의 가야금 12곡을 수용하지 않고 3명의 신라인 제자들을 통해 12곡을 5곡으로 줄여 새롭게 편곡했다. 신라적으로 변용된 가야금곡이 대가야를 멸망시킨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우륵의 정치적 망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우륵의 선택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륵은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후 560년대 전반기에 생을 마감했다. 우륵은 대가야의 성열현 사람이었지만 온전한 대가야인으로서 생을 마감하지 못했다. 또 정치·외교적으로 볼때 친 신라 노선을 견지해 신라 망명을 선택했지만 신라인으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우륵은 대가야와 신라 양쪽 모두에 속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우륵이 만든 가야금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대가야 사람으로서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을 연주하고 있다.

고령·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