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마지막 쪽지

"그동안 도움을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지난달 29일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이 같은 쪽지를 남기고 그만 저세상으로 가 버렸다. 쪽지 내용이 다르다는 소식이 전해지긴 하지만 굶어 죽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슴만 답답하고 눈시울만 뜨거워져 온다. 우리 사는 세상에 이렇게 굶어 죽는 예술가가 있어야 하는가.

32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졸업, 2002년 단편 영화 '연애의 기초'로 데뷔, 2006년 12분짜리 단편 영화 '격정 소나타'로 아시아 단편 영화제 '단편의 얼굴상' 수상. 가버린 이의 간단한 이력이지만 출신 학교나 나이나 수상 경력 등으로 보아 참 많은 가능성이 보이는 작가다. 이런 작가가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먹지 못해 죽음을 맞이했다니….

예술을 꿈꾸는 젊은이, 32세의 그가 예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먹고 목숨 부지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면 굶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굶어 죽어도 좋을 만큼 영화만을 생각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의 시나리오를 사주지는 못해도 목숨만은 지켜줘야 했는데 그렇게 보내버린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일이 처음 일어난 일이라면 화가 나도 덜 날 것이다. 작년 5월엔 영화 '겨울 나그네'를 연출했던 곽지균 감독이 "일이 없어 괴롭고 힘들다"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1월엔 싱어송 라이터인 이진원 씨가 반지하방에서 쓰러졌고, 그는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라면만 먹고는 못 살아"라는 가사를 썼었다. 이렇게 예술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없으리란 법도 없다.

그래도 우리가 OECD 회원국이고, GDP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이고 G20 정상회의를 연 나라란 말인가. 우리 삶을 고양시킬 예술가들이 이렇게 굶어 죽는 나라에 문화예술 정책이란 게 있는가 묻고 싶다. 문화예술 정책을 돈 되는 쪽으로만 밀고 나가는 나라는 후진국이 아닐 수 없다. 돈이 되지 않아도 실험예술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고, 돈이 되지 않아도 순수예술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수예술에 대한 투자 효과는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미래의 삶이 된다. 순수예술을 진흥시킬 정책이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제2, 제3의 최고은이 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만약에 지금 내가 죽어야 한다면 마지막 쪽지로 '예술가가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는 아니더라도 예술가가 굶어 죽는 나라가 되어선 안 된다'라고 쓰고 싶다.

손경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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