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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배꽃 피고 지고…"과수원 배 솎아내듯 내 삶의 편린들 한 줄 글로"

배꽃 피고 지고/김미숙 지음/수필 세계사 펴냄

'배 농사를 지은 지 십오 년이 되었다. 나무와 잎사귀를 보면 어디가 아픈지 안다. (중략) 햇빛과 공기와 바람과 물을 아무런 보상 없이 자연으로부터 받는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사랑이다. 배나무들에게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고 영양을 빼앗기지 않도록 돋아나는 새순을 잘라주는 일 뿐이다.' -배꽃 피고 지고- 중에서.

흔히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쓴 내면의 언어라는 말일 것이다. 김미숙의 수필이 그렇다. 그녀의 수필은 현장과 내면의 솔직한 반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고 붓 가는 대로 마구 쓴다고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체험과 더불어 그 체험에 대한 깊은 천착과 사유를 거친 뒤에야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김미숙의 수필에 대해 수필가 허창옥 씨는 "김미숙의 수필은 참한 그녀를 닮아 참하다"고 말한다.

새로 산 체육복을 잃어버리던 날, 소녀 김미숙은 그 체육복을 찾기 위해 종일 걷고 뛰어다녔지만 허사였다.

'석양이 나뭇가지에 걸릴 무렵이 되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어머니는 나에게 야단을 치지 않았다. (대신) 어머니와 그녀는 잃어버린 체육복을 찾기 위해 거리를 걸어 다녔다. 나는 그날 비로소 가족은 이성적으로 맞서는 관계가 아니라 감성으로 감싸는 관계라는 것을 알았고, 어떤 힘든 현실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됐다.' -초록색 체육복- 중에서.

가족은 그런 것이다. 비록 약할 지라도 '감성으로 이성을 넘어서는 가족'이 있는 한 우리는 어떤 객관적 힘에도 무너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김미숙은 "내가 태어난 곳은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는 오지마을 첩첩산중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외부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도 사람이 산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든 가고 싶은 데를 갈 수 없고, 살고 싶은 대로 살 수는 없다. 지은이는 "그래서 찾아낸 길이 글이었다"고 말한다.

인생의 또 다른 길로서 글을 찾은 김미숙은 수필문학상 신인상, 사이버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지금은 농촌과 도시를 오가며 삶을 가꾸고, 글을 쓴다. 수필가 홍억선 씨는 "김미숙의 수필은 명징하다. 꾸며서 번잡하지 않고, 억지로 빗대어 탁하지 않다. 그저 마흔 너머까지의 살아온 흔적들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았다. 삶이 곧 문학이라는 수필의 작법에 충실하였다"고 평했다.

수필집 '배꽃 피고 지고'는 총 5부로 묶여 있다. 1부는 가족과 주변 이야기, 2부는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3부는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지은이의 모습, 4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 5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쓴 이야기들이다. 삶은 필연적으로 불편과 아픔, 슬픔을 포함하기 마련이지만, 김미숙은 이를 긍정함으로써 독자를 평화로운 땅으로 안내한다.

239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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