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수륜의 집에 도착하여 집 설거지를 한다. 대문이 없는 까닭에 입구에서부터 무성히 자라난 풀을 낫으로 베기로 한다. 내린 비 탓으로 풀은 마음껏 자라고 씨를 뿌리지도 않은 들깨잎들도 풍성하게 자라 쌈 싸먹을 재료로 쓰면 되겠다. 손님이 오면 집 입구가 시원해야 되는데 이렇게 불성실하게 다듬어 놓으면 화가 인상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낫을 숫돌에 갈아 무사같이 폼을 잡고 풀을 벤다. 뽕나무 가지가 중심 길을 벗어났으니 두어 가지를 쳐내고 그리고 계단에 삐쳐나온 쑥이나 잡풀, 머위까지도 잘라버린다. 계단을 내려와서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가능하면 골고루 풀을 베어주어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을 주도록 한다.
그리고 한숨을 돌려 채마밭을 보니 지난봄에 정성들여 심은 고추 혹은 다른 채소들이 엉겨붙어 제 마음대로 크고 있거나 쓰러져 있다.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이렇게 되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를 위해 키워서 싱싱한 채소를 나누겠다는 마음을 계속 가졌다면 이렇게 팽개쳐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하나씩 달린 푸르고 붉은 고추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호박도 몇 개 달려서 "아!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이 생각난다.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쳐다본다. 뭉개구름이 피어오르고 바람이 분다. 무더운 바람이 아닌 가을 내음이 나는 바람이 분다. 주위를 둘러보니 벌써 열매가 달린 것이 있다. 밤나무 가지에 밤송이가 제법 굵게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가을이 온다. 가을이라… '올가을엔 사랑할거야' 라는 노래가 생각나고 우리는 왜 서로가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날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예술가들의 사랑이란? 무엇이 다른 이보다 특별한가? 환경이 조금 다를 뿐이지 별다른 게 없는 거 같다. 폴락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잭슨 폴락이라면 미국이 가장 미국적인 작가라고 선전하고 내세운 액션 페인팅의 대가이다, "나는 유명한데 왜 가난한가?"라는 말을 남긴 화가 폴락은 페인트를 물감처럼 마음껏 뿌리고 휘저어서 작품화시킨 걸로 유명하다. 2차대전 이후 현대미술이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그 중심을 옮길 무렵 가장 미국적인 회화, 추상표현주의가 태동할 때 선두주자로 나선 그이다. 폴락은 알콜 중독자에서 변신하여 세계적인 작가로 등장할 무렵 동료 여류작가와 사랑에 빠지고 유명 갤러리에서 지원을 받기도 하며 매스컴에서 스타로 각광까지 받는다.
뉴욕의 상류사회 속의 예술가가 그렇게 지속적인 지원을 받으려면 인간관계가 원활해야 한다.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폴락은 아이를 원했으나 부인은 남편이 좀 더 유명해지고 인정받아 안정적인 작가 생활을 해야 된다고 믿었고 이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어 부부는 별거를 하게 된다. 화랑의 지원도 끊어지고 다시 알코올 중독의 길로 접어들고 결국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맞는 한 예술가의 삶을 영화 '폴락'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극장 한구석에서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예술가의 운명이란 참 어쩌면 저렇게 슬프게 끝날 수 있는가 싶어서 말이다. 나도 한 여성을 한때 좋아했고 사랑이라는 표현을 써서 문자를 날리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말은 추상적이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정신적이며 물질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 가을이 올 무렵 사랑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는 사랑할 때다" 라는 제목처럼 예술을, 예술가를 사랑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일신의 행복을 위해, 유명세와 돈을 벌기 위해 예술가는 예술을 내세우지 않는다. 예술 정신이란, 주위를 배려하는 그 무엇이다. 예술가는 민족이나 이웃을 위한 사랑을 베풀기 위해 작품을 만든다. 물론 좋아서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주위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가을이 다가오는 푸른 하늘을 보니 부드럽고 감미롭다. 나는 이 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저 하늘처럼 부드럽고 감미로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마다 다른 생각과 주장이 있겠지만 이 자연 속에서 나온 작업들은 결국 우리의 시대 정신과 맞물려 있으니 그 속에 사랑이 느껴진다면 좋지 않겠는가. 자~ 이제는 서로가 사랑할 때다!
정태경(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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