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명의 거리 미술가들 '자유'를 그렸다

정병모/'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다할미디어 펴냄

우리나라 전통미술 가운데 세계화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무엇일까?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민화'라고 단언한다. 한국의 미술사학계에서는 푸대접받고 있지만 오히려 외국 미술학계에서 먼저 민화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민간미술 연구가 베트릭스 럼포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이라고 민화를 표현했다.

저자는 10여 년간 민화를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민화의 가치와 세계화의 가능성에 대해 눈뜨고 책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다할미디어 펴냄)를 펴냈다.

한국회화에서 빙산의 일각인 10%가 안견, 김홍도, 정선과 같은 정통화가라면 나머지 90%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무명화가들이 담당한다. 조선시대 그림 수요의 대부분은 무명화가들이 충족시켰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무명화가들이 그렸다고 해서 민화의 가치를 몰라봤던 것이 사실이다.

무명화가들의 민화가 새삼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통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전통의 굴레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반면 무명의 서민화가들은 어떤 권위에도 구애되지 않고 어떤 규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과감하지만 무심하게 전통의 형식을 파괴해 나갔고, 그 형식을 재구성했다. 전통이라는 단단한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다채롭고 풍요로운 예술세계가 영롱하게 빛난다. 저자는 민화의 가장 큰 가치를 '자유'로 보고 있다.

저자는 민화를 우키요에와 비교하기도 한다. 일본의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의 서민화가로,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한 서구의 예술가들이 우키요에에 열광하면서 전세계를 무대로 히트했다. 우키요에의 캐릭터가 세계 곳곳의 일본 음식점을 장식하고 우키요에를 활용한 문화상품들이 가득하다. 19세기 이후 세계적인 미술로 각광받기 위해서는 이처럼 대중미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키요에를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민화 역시 세계적인 미술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다.

19세기 '구운몽도'의 공간은 전혀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 아래로부터 가운데가 꺾인 성벽, 마당, 매화나무 등 겹겹이 펼쳐져야 할 장면이 놀랍게도 한 평면 속에 압축돼 있다. 문설주, 담, 벽, 건물 등이 반복적인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어 구상적인 인물이 두드러져 보인다.

민화는 소박하고 단순하다. 서민들은 복잡한 표현보다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그 까닭은 민화가 궁중회화나 문인화와 달리 원초적 이미지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란도'는 구성이 간결하다. 모란꽃과 잎은 최소화하고, 기하학적으로 패턴화된 수석 위에는 붉은색과 흰색 모란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간결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작품이다. 회화적인 활달함과 자유로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한편 책거리는 궁중에서 제작돼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성을 보여주는 주제다. 하지만 궁중에서 시작된 책거리는 철저하게 민화식으로 단순화됐다. 핵심만을 간략하게 표현해 이미지의 호소력을 높이는 것이다.

이우환은 민화의 특색을 '추상적인 환상'이라고 평가했다. 현실을 그린 것 같지만 현실성이 부족하고, 상상의 세계인 것 같지만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민화는 조선시대의 대중문화다. 춘향가 사설을 들어보면 춘향의 집 구석구석이 각종 민화들로 장식돼 있는가 하면 사대부가에 쓰이는 가구에도 민화가 장식돼 있었다. 해인사, 통도사 명부전은 안팎의 벽면이 대부분 불화가 아닌 민화로 장식돼 있다.

이 책은 주제별로 민화의 특색을 살피고 있다. 민화가 현대와 세계에서 주목받는 민화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대표적인 민화 작품을 통해 느껴볼 수 있다. 332쪽, 2만원.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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