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인근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 개울가에는 늙은 털왕버들 한 그루가 살고 있다. 수령 200여 년을 헤아리는 이 고목은 둘레 4m, 높이 20여 m가 넘는 큰 덩치를 자랑한다. 버드나무라 지칭되는 포플러 종류는 지구상에 가장 흔한 식물이다. 은백양'은사시'수양버들'능수버들'사시나무'이태리포플러'미루나무'떡버들'왕버들'갯버들 등등은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무들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털왕버들은 청도 각북 말고는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나무는 일찌감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털왕버들의 자랑거리는 한껏 푸르른 이파리의 무성함에 있을 것이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진정한 본질은 수피(樹皮)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털왕버들의 수피는 느티나무나 벽오동처럼 매끈하지 않고 짜놓은 마른걸레처럼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져 있다. 때로는 그것이 극심한 고통을 견디는 사람의 구겨진 주름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릇 모든 사물의 외형적 모습은 내부정황의 정확한 반영이 아닌가 싶다. 목질이 단단한 대추나무의 꽃이 작고 야무지게 가지에 달라붙는다면 속살 무른 살구나무의 꽃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금세 좌르르 쏟아진다. 어디 식물만 그런가, 사춘기 아이들의 감당할 수 없는 뜨거운 에너지는 여드름이라는 생리현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털왕버들의 그 지독한 뒤틀림은 나무의 고통스런 내면의 현현이 아니고 무얼까.
우리가 보는 나무는 실은 반쪽짜리다. 10여 년 전 태풍에 나무가 쫙,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200여 년 동안 장수를 누려왔던 나무가 어느 한날 스스로 짐작할 수 없었던 운명에 의해 반신불수의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몸이 두 쪽으로 갈라졌으니 고통도 반으로 나눠진 걸까?) 집이 앞산 부근에 있어서 아침마다 산책 나온 편마비의 환자들을 자주 보게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야말로 혼신의 힘으로 걸음을 걷는 그들. 마치 털왕버들 수피처럼 뒤틀린 걸음이다. 그중에는 얼마 전까지도 인사 나누며 산을 오르내리던 이웃들도 섞여 있다. 다복한 삶이 어느 날 불어 닥친 태풍의 폭력에 의해 일시에 파탄이 나버린 것이다.
나의 삶이 늘 안온한 평화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지일까, 자만일까. 불행과 고통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다행히 잠시 평탄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불운은 언제 우리의 목덜미를 낚아챌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 위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 위태로움이 우리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죽음이라는 종국적 결말이 있기 때문에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행과 고통이 있어서 삶의 행복과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것. 어떤 측면에서는 더 떨어질 곳 없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상에 있는 사람은 떨어지는 일밖에 남아있지 않고 지금 바닥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올라갈 일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주역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양과 음의 기운은 항시 교차되는 것. 영원불변한 고정된 자리란 이 세상에 없다.
각북의 털왕버들 주변에는 불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역시 버드나무 종류인데 털왕버들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둥치가 굵은 고목이다. 무슨 연유로 불이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나무는 속이 시커멓게 타버려 컴컴하게 비어있다. 내장을 다 긁어낸 암환자처럼 속을 비운 채 수피로만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나무. 놀라운 것은 이 불탄 고목에도 해마다 봄이 되면 연둣빛 새싹이 돋아난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참담한 절망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새 생명을 피워내는 나무들. 그 숭고한 삶의 자세를, 음의 기운이 천지를 뒤덮고 있는 이 동짓달 한가운데서, 지금 이 순간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이웃들과 함께 떠올려본다.
장옥관/시인·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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