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송은 김광수 선생과 의성 사촌 만년송

벼슬길 단념하고 고향에 심은 나무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는 좀 특별한 마을이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지만 유학의 연원이 깊고, 임진왜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선비들이 일어나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600여 년 전 안동인 김자첨(金子瞻)이 고려가 망하자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했다고 한다. 기천(沂川)이 감싸 돌아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 농사짓기에 좋았으나, 서쪽이 비어 인물이 나지 않고 매서운 바람으로 생활마저 불편하자 숲을 조성했다. 폭 20~30m, 길이 800m, 수령 400~600년생의 갈참나무 등 10여 종 500여 그루가 어울려 자라는 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 그것이다. 일명 서림(西林)이라고도 한다. 입향조의 이런 자상한 배려가 헛되지 않아 증손 송은 김광수(金光粹'1468~1563)대에 이르러 명문으로 기반을 굳혔다.

공은 대과에 급제하고 지례현감을 지낸 아버지 김극해(金克諧)와 어머니 연안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천성이 고요하고 맑았으며 부모를 잘 섬기고 이웃 어른을 공경했다고 한다.

1501년(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입지를 넓히고 있었다. 성리학은 물론 역학(易學)에 능해 원로들의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고 사화로 올곧은 선비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 그루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07호)를 심고 자호를 송은(松隱)이라 하고 병봉산 언덕에 영귀정(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234호)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며 은둔생활을 즐겼다. 공이 직접 심은 향나무, 즉 만년송(萬年松)을 두고 두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한 편은 다음과 같다.

이끼 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후미진 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고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萬年松)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만년송=향나무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풍속이 비루해지자 공은 탄식하며, 잠(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손들도 지키도록 했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둘째 나라에 충성할 것이며, 셋째 제사를 잘 받들고, 넷째 집을 바르게 다스려야 하며, 다섯째 동기간에 화목하고, 여섯째 죄를 짓지 말 것, 일곱째 남을 헐뜯지 말 것, 여덟째, 여색에 빠지지 말 것, 아홉째, 친구를 잘 사귈 것, 열째 분수를 지킬 것 등이다. 96세, 천수(天壽)를 누렸다. 저서로 '송은문집'이 있으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 되었다.

조선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1542~1607)은 바로 공의 외손(外孫)으로 이곳 사촌에서 태어나 공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임란 시 정제장(整薺將)으로 활동하면서 굶주린 이웃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어 '김씨 의창(義倉)'으로 불렸던 김사원(金士元'1539~1601)과 두 아우, 김사형(金士亨'1541~?), 김사정(金士貞'1552~ 1620) 역시 공의 증손이다.

조선 후기 문신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1724~1797)은 대산 이상정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가르친 제자만도 100여 명에 이르고 '성학정로', '상학입문' 등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역시 공의 10세손이다.

사촌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가로숲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만년송과 더불어 김씨 문중을 대표하는 또 다른 문화재로 아름다운 고 건축물 만취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이 있다. 당호는 조선의 명필 한호(韓濩)의 작품이다. 송은은 시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덕과 학문이 영남 일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그 후손들 또한 도학과 문장이 대대로 이어져 대소과에 등제한 이들이 5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숲을 조성하여 허한 부분을 보하고, 땅을 기름지게 하여 농작물이 잘 되게 한 입향조와 '경심잠' 십조를 지어 후손들에게 삶의 도리를 가르친 선대의 음덕일 것이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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