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백일장] 할머니와 유모차/고향의 봄/바다/목련/틈

♥수필1-할머니와 유모차

내가 사는 아파트 1층에 연세가 90세 넘은 인자한 할머니가 외롭게 홀로 살고 계신다. 연세가 워낙 많아서인지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 새벽기도를 다녀오신다. 내가 새벽 운동을 나갈 때면 아파트 후문에서 약속이나 한 듯 할머니를 만난다. 만날 때마다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웃음 속에는 인자함이 묻어있다. 내 어릴 적 친할머니 같다.

할머니의 유일한 이동수단은 유모차다. 유모차라면 갓난아기들만의 전용물이라 생각하겠지만 지금 농촌에서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의 교통수단이고 지팡이에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교회나 시장에 가실 때에는 가장 동선이 짧은 아파트 후문 쪽으로 다니신다. 그런데 아파트 주민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밤늦게 후문 쪽에 주차를 해 통로를 막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엄청난 장애물을 만난 듯 매우 당황하신다. 유모차가 좁은 후문으로 통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르막이 있는 아파트 정문까지 돌아서 자택까지 돌아가려면 약 20분 이상 걸린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장애를 겪고 사시는 분이 꽤 많다. 특히 건강이 좋지 않는 할머니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양보와 배려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요즘은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도 문을 철통같이 닫고 살기 때문에 사실상 서로를 잘 몰라 이웃사촌이란 말도 옛말이 되었다. 밤새 안녕이라고 요즘 신종어로 '고독사'라는 말이 신문 지면에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가끔씩 계단을 오르내리며 초인종을 눌러 안부를 물어본다.

"할머니 수돗물은 잘 나오나요? 전구 다마(전등)는 갈아 끼울 때 안 됐어요?"

김용현(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수필2-고향의 봄

요즘은 하루 24시간 안에도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변하고 있다. 나는 너무 빠른 것 보다 조금 느린 것을 더 좋아한다. KTX보다 무궁화를 좋아하고, 자동차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걷는 것을 좋아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하루를 주심에 감사하고 집 앞 살구나무, 사과나무, 매실나무, 자두나무에 둘러싸인 봄의 모습을 좋아한다.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국사봉에는 얼마 있지 않아 진달래꽃이 필 것이고 어제 내린 봄비에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더 활기차다. 꽃샘추위에 움츠렸던 꽃망울들이 피어나고 불어오는 바람에 꽃비 되어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따뜻한 봄날에 내리는 눈과 같이 아름답다.

저녁 달빛에 살구꽃은 더 눈부시게 아름답고 아침 출근길에 내 코끝을 간질이는 봄 향기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느새 내 마음 속 도화지에 아름다운 고향의 봄을 그려본다. 나는 내 고향 봄의 아름다운 모습을 해마다 설레며 기다린다.

박경숙(김천시 아포읍 국사1리)

♥시1-바다

바다, 그 깊고 푸른 속삭임을

들어봤는가?

자그르 자그르

깨알 같은 미소를 흘리면

소년, 종일토록 파도의 애무에 젖어

파아란 시 한편 그려내고

끼루룩 끼루룩

먹이를 찾아 날아오른 날개짓

햇살, 부딪히는 바다의 숨소리로

날아야 사는 삶을 노래하네

때로는

온화하나

때로는

격동하는

그 깊은 속내 알 수 없는

바다, 어머니의 젖줄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이다.

효종스님(반야선원 주지)

♥시2-목련

넌 꿈이다

목화밭을 지나던

그 설레임으로

피어난 꽃

낮에는 수북한 사랑으로

밤에는 항구를 떠나는 흰 돛대로

떠다니는 꽃

떨어진 꽃을 주워

한 잎 한 잎 꿰매고 싶다

그리고

그 꽃 돛대를 달고

멀리 바다로 나가

난 사랑을 낚고 싶다

민창기(영천시 대창면 병암리)

♥시3-틈

산을 오르는 길에 보았다

침엽의 나무 한 그루, 안 보이는

허공을 향해 내돋친 성긴 가시들

나는 잠시 길 위에 서서

저 뾰족한 내 생의 모습들을

둥그런 활엽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생각에 잠기는데

가시와 가시 사이

내리꽂히는 한 줄 빛에

눈이 아려온다

저 틈이 키워냈겠구나

그늘진 나무 밑동마다

기대어 핀 꽃이며 풀들

활엽으로는 경작 못하였을

어떤 비움이며 양보 같은 것들

그렇구나,

내 마음을 조금만 열어주면

다른 생이 저리도 자라나는 것을

최순옥(대구 수성구 범어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허이주(대구 달서구 성지로)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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