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5일 오후 대구 중구 서문시장 동산상가 1층. 의류매장 앞 복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옷 구경을 하거나 상인과 흥정을 하는 손님들로 붐볐다. 그런데 건물 계단과 입구에서 건장한 남성 몇몇이 눈에 띄었다. 잠복 중인 대구 중부경찰서 강력4팀 형사들이었다. 이들은 서문시장에 소매치기 범죄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동한 것이었다.
오후 3시쯤, 옷 구경에 온 신경을 빼앗긴 손님들 사이에서 수상쩍은 여성 한 명이 포착됐다. 강력4팀 형사들이 CCTV를 통해 범행 장면을 확인한 K(35'여) 씨였다. 순간 형사들은 K씨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며 포위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K씨의 손이 한 손님의 가방을 향해 재빠르게 움직였다. 소매치기 수법 중 하나인 '맨손빼기'였다. 상대방 가까이 접근해 맨손으로 지갑 등 금품을 빼내는 비교적 단순한 수법이다. 범행 장면이 형사들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K씨는 현행범 신분이 됐다. K씨는 곧장 형사들의 손에 붙잡혔다.
K씨는 지난해 12월 초부터 이날까지 4개월 동안 서문시장에서만 20차례 소매치기를 해 500만원 상당의 현금과 지갑 등을 훔친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대구 중부경찰서는 지난 4월 9일 소매치기 혐의로 K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소매치기 범죄는 약화 추세
소매치기범 검거에 잔뼈가 굵은 일선 형사들은 소매치기가 예전 만큼 성행하지 않다고 말한다. 대구 중부경찰서 강력4팀 팀장 남모 경위는 "옛날에는 건장한 남성 여러 명으로 구성된 소매치기 조직이 예식장이나 은행 인근에서 현금 뭉치를 노렸다. 하지만 요즘 소매치기 범죄를 보면 여성이 대부분이고, 혼자서 범행을 저지른다. 주로 전통시장에서 푼돈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생계형 범죄에 가깝다"고 말했다.
실제로 옛날에 비해 소매치기 범죄는 많이 줄었다. 이에 따라 소매치기만 전담하는 경찰 인력도 오래전에 사라졌다. 남모 경위는 대구에서 소매치기 검거 전문 형사로 오랜 기간 활약했다. 그는 "이전에는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주변, 시내 예식장, 버스터미널 등을 돌며 하루 종일 소매치기범만 잡으러 다녔다"고 말했다. 과거 한일극장 주변은 대구 시내에서 인파가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었다. 소매치기범들에게 '물 반, 고기 반'의 장소였다. 그만큼 소매치기 수법이 잘 통하는 곳이었다. 특히 한일극장 앞 지하도는 늘 혼잡해 소매치기범들이 득실거렸다. 예식장은 하루 종일 축의금 봉투가 오고 가는 곳이었고, 버스터미널은 등록금 봉투를 들고 시골에서 도시로 가는 학생들이 많아 한 건을 노리는 소매치기범들의 표적이 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느 곳도 소매치기 범죄의 명소가 되지 못한다. 신용카드 사용이 늘면서 지갑을 훔쳐도 현금은 구경도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 CCTV가 곳곳에 많이 설치되면서 위험 부담이 커진 것도 소매치기범이 줄어드는 한 원인으로 해석된다.
◆현금 찾아 전국을 떠도는 소매치기범들
환경이 바뀌면서 소매치기들의 주 활동 무대가 변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도심을 떠나 그나마 현금이 빈번하게 오가는 전통시장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여는 행사장으로 소매치기범들이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최근 갈 곳 잃은 소매치기범들의 집결지로 떠오른 곳이 현재 엑스포가 열리고 있는 전남 여수다.
지난달 5일, 10만 명의 인파가 몰린 여수엑스포 개막식 예행연습 현장에서 할머니 7명의 금목걸이가 차례로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할머니들은 모두 60대 한 남성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은 이 남성이 "바닥에 떨어진 제 안경을 밟지 마세요"라며 할머니들에게 접근한 뒤 할머니들이 안경을 주워 주려고 고개를 숙이자 속칭'굴레따기' 수법으로 할머니들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채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전남 여수경찰서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3, 4개 소매치기 조직이 여수엑스포 개최를 틈타 여수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추적 중이다. 평소 한 달 1, 2건에 불과하던 여수의 소매치기 사건이 하루에만 6건이나 발생한 데 따른 것이다.
◆'손맛'과 '새 삶' 사이 갈등
경찰은 소매치기의 경우 재범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특히 요즘 전통시장이나 지방자치단체 행사에 나타나는 소매치기범들이 새롭게 양성된 것이라기보다는 과거 소매치기범이었던 50, 60대가 '손맛'을 잊지 못하고 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한 지하철역에서 소매치기로 스마트폰을 훔치다 경찰에 붙잡힌 N(64) 씨. 그는 1980년대 서울 명동 일대를 주름잡던 소매치기 조직인 '영철파'의 핵심 조직원이었던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이렇듯 과거 소매치기범들이 범죄의 굴레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소매치기 경력을 과감히 떨쳐내고 새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주인공은 바로 유모(60'대구 달서구) 씨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보육시설에 맡겨진 그는 열세 살 때부터 소매치기 세계에 빠져들었다. "현금 뭉치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 하나 잘 훔치면 최고급 호텔에서 몇개월 동안 흥청망청 즐기며 지낼 수 있었어요. 돈이 떨어질 때쯤이면 또 다른 지역으로 한탕하러 떠났어요."
그는 범행을 저지르다 경찰에 붙잡혀 수감 생활도 몇번이나 했다. 하지만 6개월~1년 정도 복역을 하고 나와서 또 남의 주머니 속 지갑을 털어 흥청망청 사는 삶을 살았다. 그는 1965년 소년원 수감을 시작으로 1989년 청송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20여 년 간 전국 30여 곳 교도소를 제 집 드나들듯 했다.
그랬던 그가 새 삶을 살게 된 건 17년 전 한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아내를 만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직업도 가졌고,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 돼 소매치기범이 아닌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있다.
"물론 처음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시 소매치기나 할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아내와 가족이 곁에 있어 이겨냈습니다.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게 지갑을 털며 느끼는 짜릿한 '손맛'이요? 이젠 깨끗이 잊어버렸습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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