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노엽지 않은가. 그대를 조선군의 수괴라 부르는 적보다 역도라 칭하는 군왕이 더욱 노엽지 않은가. 그 불의에 맞서지 못하고 그대의 함대를 사지로 이끌고자 한 세상의 비겁이 노엽지 않은가. 칼은 살뜰하게 내게 보챘다. 적의 피로 물든 칼을 동족의 심장에 겨누지 마라. 그 무슨 가당치 않은 오만인가.(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에서)
오랜만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다시 보았다. 명량해전, 다시 보는 통제사는 여전히 절박하고 쓸쓸했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들, 밖의 적보다는 안의 적들로 인해 통제사는 쓸쓸했다. 통제사처럼 진정으로 쓸쓸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더욱 쓸쓸했다. 계속된 무리한 강행군으로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자꾸만 무거워 오는 머리와 허리 통증에 한없이 쓸쓸했다. 서로 생각이 다름이 결코 틀림은 아닐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여전히 잔인한 타인들의 생각 두께로 인해 내 마음은 바람처럼 쓸쓸했다.
아끼는 후배 하나가 많이 힘들어한다. 몇 년 동안 엄청난 열정과 독특한 아이디어, 그리고 확고한 교육신념으로 함께 많은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런데 한계가 자꾸 느껴지는 모양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자꾸만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사지에서는 살 길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살 길이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현실이기도 했고 '명량'을 앞에 둔 통제사 자신의 운명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셈이다. 유속을 활용하고 지형을 이용해 이겼다는 것은 결과일 뿐이다. 울둘목의 승리 이면에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통제사 자신의 절박함이 존재한다.
그렇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절박함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어느 여름, 절박했다.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 절박함은 나를 사지로 이끌었고 그 사지는 결국 내 삶의 새로운 길이었다. 지금 후배는 지독한 절망 속에 살던 그 여름날의 내 길을 지금 걷고 있다. 같지만 다른 풍경이 쓸쓸했다.
왜 오늘을 사는가? 나는 그 대답을 항상 통제사에게서 찾는다. 통제사는 나에게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어렵게 찾은 희망조차도 무의미하게 변질시키는 세상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가는 길을 가르친다. 다른 시대를 살지만 그 실체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상이 쓸쓸했다. 통제사를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후배도 400여 년 전의 통제사처럼, 그리고 어느 여름날 한없는 절망 속에서 절박하게 몸부림쳤던 보잘것없는 나처럼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선택의 기로에서 늘 통제사의 선택을 떠올렸다. 사실 통제사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어쩌면 퇴로가 존재했던 적들보다도 더 불행했던 셈이다. 결국 통제사는 적의 퇴로를 끊는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통제사의 유일한 퇴로였던 게다. 문득 칼로 베어지는 적을 지닌 통제사가 역설적으로 부러웠다.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스스로 자신만의 자연사를 선택한 통제사가 부러웠다.
아니다. 이런 마음의 흐름조차 사치이다.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은 오히려 통제사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이리라. 가장 먼저 싸워야 할 적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는 마음일 때 나는 진실로 통제사를 부러워할 수 있으리라.
책 출판기념회가 끝났다. 냉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행사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행사 준비를 하던 내 오랜 친구들이 떠올랐다. 그것이다. 내가 통제사를 부러워하지 않는 유일한 부분이다. 내가 걸어가는 길에서 결코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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