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재령인 운악 이함과 영덕 충효당 은행나무

수령이나 역사적 의미에선 천연기념물 수준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는 충효당(중요민속문화재 제168호)이라는 고색창연한 고택이 있다. '재령 이씨 영해파 종택'이다. 운악 이함(李涵'1554~1644)이 1602년(선조 35) 완성했다고 한다. 당호 충효는 후손들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의 글씨라고도 한다.

본관지가 황해도 재령인 그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린 것은 1497년(연산군 3) 영해부사 이중현(李仲賢'1449~1508)이 조카 애를 책실(관아에 보관 중인 서책을 관리하는 사람)로 데리고 왔는데 그가 영해지역의 호족 진성인 백원정(白元貞)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여 처향(妻鄕)에 정착한 데 따른 것이다. 1515년(중종 10) 무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 무안'함창 현감, 경주 판관을 거쳐 울진 현령을 지냈다.

재령 이씨 영해파가 우리나라 명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기초를 다진 분은 이애의 손자 운악이다. 공은 1554년(명종 9)에 태어났다. 당대의 석학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낸 황응청(黃應淸'1524~ 1605)에게 수학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향시에 여러 번 나아가 명성을 높였으며 학봉 김성일과도 우정이 돈독했다고 한다. 1588년(선조 21) 진사, 1600년(선조 33) 대과에 급제했다.

임란 중 순찰사 한효순이 군사를 거느리고, 안동에서 청송 진보로 가는 중 군량미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수십 석을 보내 군의 사기를 높이자 공으로 하여금 동해의 염장(鹽場)을 관장하여 군량미를 조달케 했는데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하여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전란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때 기근까지 겹쳐 굶주린 백성들이 늘어나자 집안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는 도토리를 주워와 죽을 끓여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접하느라고 부인 진성 이씨와 며느리 장씨의 손에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체찰사 이원익의 천거로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으로 나아가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을을 안정시켰다. 이웃 고을 성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원군의 군량미 조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수령이 직무를 기피하고 고을 사람들도 숨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을 수습 책임자로 임명하니 이 난제 역시 성공적으로 수습됐다.

1603년(선조 36) 의금부 도사(都事), 사재감 직장(直長), 주부(主簿)로 자리를 옮기며 가는 곳마다 공무를 혁신했다. 1607년(선조 40) 의령 현감으로 나갔다. 7년 동안의 임란은 전국을 초토화시켰는데 이곳 역시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공은 백성을 보살피는 한편 아전들을 설득시켜 고을을 안정시켰다.

특히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해 피폐해진 향교를 재건하고 바쁜 공무 중에도 틈을 내 직접 소학과 사서를 강론했다. 1609년(광해군 1) 두 번째로 문과에 급제했으나 당파 싸움으로 세상이 혼란하자 전원으로 돌아왔다. 1632년(인조 5) 세상을 뜨니 향년 79세였다. 훗날 손자 문경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서인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남인으로는 이례적으로 이조판서에 오르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선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상당한 재력가임에도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나라가 필요로 할 때에는 기꺼이 창고를 열고 굶주린 이웃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었을 뿐 아니라, 자손들을 위해 많은 정성을 쏟았다. 특히 '만권의 책을 모으면 문창성(文昌星'학문을 맡아 다스리는 별)이 비춘다' 하여 만권서루를 만들었으며 글씨 쓰는 데 필요한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수십 마지기 밭에 닥나무를 심어 종이를 생산했다고 한다.

종택의 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은행나무는 운악이 심은 나무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행단(杏壇)을 손수 만들어 후손들이 유학을 성취하라는 뜻일 것이다. 이 무거운 가르침은 현대에도 이어져 오늘날 전국에서 가장 큰 유림인 박약회를 이끌고 있는 이용태(李龍兌) 회장이 운악의 19대 종손이라는 점 역시 결코 이 행단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수령이나 역사적인 의미로 볼 때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로 지정됨이 마땅하나 군의 보호수에 그치고 있어 아쉽다. 사당(祠堂) 앞에는 가지가 동서로 뻗은 회화나무가 있다. 동쪽 가지가 무성하면 영해 쪽의 자손이, 서쪽의 가지가 무성하면 석포 쪽의 자손이 번성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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