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국 기능대회 양장부문 메달 가족 권오탁 씨네

"우린 직녀의 후손" 행복한 '재봉틀 수다'

가족 전체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메달을 딴 권오탁 씨 가족. 왼쪽부터 권오탁 씨, 부인 이원출 씨, 권 씨의 동생 오길 씨, 권 씨의 딸 이아 씨.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가족 전체가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메달을 딴 권오탁 씨 가족. 왼쪽부터 권오탁 씨, 부인 이원출 씨, 권 씨의 동생 오길 씨, 권 씨의 딸 이아 씨.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우리 가족은 기능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권오탁(54) 씨 가족은 기능대회 메달리스트만 넷이다. 권 씨와 동생 오길(49) 씨, 부인 이원출(47) 씨, 딸 이아(22) 씨는 대구기능대회와 전국기능대회 양장 부문에서 모두 메달을 땄다.

권 씨는 제자 양성에도 힘써 그를 거친 많은 제자가 기능대회에서 메달을 땄다. 이런 결과로 이달 10일 끝난 제47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공로상 격인 '금탑'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우리는 양장 기능 가족"

'권오탁패션'을 운영하는 권 씨는 1982년 대구와 전국기능대회 양장 부문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니트업체 '태양'을 운영하는 동생 오길 씨는 1983년 대구대회와 1984년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권 씨 부인 이 씨는 1997년 전국대회에서 은메달을 땄고, 딸 이아 씨도 2010년 대구대회 금메달과 전국대회 우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런 입상 실적은 권 씨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권 씨는 기능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어릴 적부터 꿈이었을 만큼 기능대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권 씨는 양복가공을 업으로 하다 1975년 양장에 손을 댔다. 권 씨는 "양장을 돈벌이로만 생각지 않으면 더없이 훌륭한 예술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옷 디자인과 재단, 봉제를 거쳐 작품을 만들어내면 큰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오길 씨는 1970년대 형의 영향으로 양장을 접하게 됐다. 오길 씨는 "당시에는 생활형편 때문에 뭔가 일을 해야 했고 형이 양장을 하고 있어 따라 하게 됐다"고 했다.

이원출 씨는 양장을 하면서 남편을 만났고, 남편의 권유로 기능대회에도 도전했다. 이 씨는 "남편을 포함해 스승이 2명이나 되다 보니 짧은 시간에 실력을 키울 수 있어 기능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했다.

딸 이아 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양장을 하는 것을 계속 봐 온 데다 손재주가 있었다. 어릴 때 양말이나 티셔츠를 잘라 인형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소질에 더해 3년 정도 집중 트레이닝을 받아 전국대회에서 은메달을 딸 수 있었다.

권 씨는 "기능대회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서는 만능이 돼야 한다"고 했다. 디자인과 재단, 봉제 등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하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는 것.

권 씨는 "무엇보다 출제자의 생각을 빨리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고, 패션 트렌드도 발 빠르게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권 씨는 제자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를 거쳐 간 제자 중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딴 이가 18명에 이른다. 이런 이유로 우수 기능선수를 많이 배출한 단체나 개인에게 주는 금탑도 받았다. 금탑이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기능대회 사상 두 번째라는 것.

◆기능대회 위상 '격세지감'

권 씨가 기능대회 메달을 꿈꾼 것은 당시 기능대회의 위상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권 씨가 메달을 딴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도심 카퍼레이드와 대통령 만찬까지 열어줬다. 권 씨는 "당시엔 기능인이 최고로 대접받던 시절"이라고 했다. 1982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능대회를 시찰했을 때 대회 도중에 상금을 3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올린 일이 있었다. 당시 직장인 월급이 대개 8만~10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는 것. 또 산업시찰이나 관광 등 각종 혜택도 뒤따랐다.

그러나 기능인들은 상금보다 메달 자체에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권 씨는 "메달만 따면 기업체 사장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사장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점차 기능대회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대통령 방문도 사라졌고 정부 지원도 대폭 줄었다. 권 씨는 "요즘은 기능대회 입상이 프로야구 선수가 안타를 친 것보다 관심을 덜 받는 것 같다"며 "전국대회를 해도 뉴스조차 타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경쟁률도 많이 낮아졌다. 기능대회가 한창 인기있을 때는 지방대회 경쟁률이 10대 1 정도였지만 지금은 3대 1 정도에 불과하다.

권 씨는 "정부에서 기술강국이라는 말은 많이 하지만 기능인들에 대한 처우가 과거보다 못한 것이 현실이다"고 말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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