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들고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일. 이것이 출판문화운동의 세 주체다. 독자 없는 책이 있을 수 없고 책 만드는 출판인 없는 저자도 있을 수 없다. '독자'와 '저자'와 '출판인'은 수평적 연대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으로 한 시대의 이론과 사상을 세워야 한다. (책을)만들면 만들수록 책의 이론과 사상을 온몸으로 체득한다. 책 없이 한 민족과 한 국가와 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없다. 저는 베스트셀러를 믿지 않는다. 몇 권 팔리지 않는 책이라도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김언호(68) 한길사 대표는 출판문화운동가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들어가 기자로 일하던 그는 19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되자 출판사를 차렸다. 그것이 36년이 된 '한길사'다.
"학교 다닐 때는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기자가 됐는데 '타의'에 의해 언론을 떠나게 됐지만 본래부터 책을 좋아하고 책과 가까웠기 때문에 출판을 하게 됐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언론인의 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자보다 더 깊이 있게 장기적으로 성찰하고 탐구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처음부터 책의 존엄, 책의 정신을 알지는 못했다. 책의 미학과 책의 위대한 가능성은 책을 만들면서 체득하게 됐고 책이라는 것이 한 시대를 일으켜 세우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반듯하게 살아가게 하는 정신과 사상의 이론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책이 한 시대의 정신과 사상의 토대라는 그의 말처럼 한길사의 책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정신과 사상, 철학의 바탕이 됐다.
그는 단순한 출판인이 아니다. 출판문화운동가다. 그는 1980년대 '출판인 17인 선언'을 주도했고 '파주출판도시' 구상도 현실화했다. 그러고는 맨 먼저 파주로 이사했고 이제 파주출판도시 프로젝트는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변방주의자'라고 부른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프런티어다. 서울에서 파주로 간 것도 변방에서 중심을 잘 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 한가운데에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책 만드는 사람은 변방정신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바로 비판적 지성이다. 그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있는 자의 편에 서서는 책을 만들 수 없다."
파주출판도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2011년 파주북소리 축제를 시작한 데 이어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를 조직하는 등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그를 파주 출판도시 한가운데 있는 '한길사' 그의 서재에서 만났다.
-최근 '한 권의 책을 위하여'란 책을 통해 한 인문주의자 김언호의 책 만들기 과정을 독자들에게 공개했다.
"책 만드는 과정과 책 만드는 일상, 책 만드는 사람의 생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리포트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간했다. 80년대에 낸 '출판운동의 상황과 논리'는 그 당시 출판의 자유를 주장하고 검열을 비판했다면 90년대에는 '책의 탄생'을 냈다. 그 연장선상에서 2010년 우리가 만난 우리 시대의 저자들을 소개한 '책의 공화국에서'를 내놓은 데 이은 네 번째 책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저는 전부터 일기를 쓰고 있다. '출판일기'인 셈이다. 이번에 낸 책은 저의 출판의 철학이랄까 시대정신 등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다. '독자가 중요하다. 독자에 의해 한 시대의 출판문화가 완결된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헤이리는 왜 시작했는지 출판도시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등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저는 40년간(36년) 나름대로 치열하게 책을 만들어 왔다. 역사에 남을 책, 100년 후에도 기억될 책을 마지막으로 만들고 싶다."
-100년 후에도 기억될 수 있는 '한 권의 책'은 어떤 것인가.
"우리 역사와 우리 문화, 우리 정신과 우리 사상 이런 것을 우리 말과 글로 만드는 것이 1차적으로 우리 출판인에게 주어진 할 일이다. 그다음에는 보편적인 것, 이를테면 동아시아 공통의 정신과 역사 철학, 더 나아가 세계적인 문제를 다뤘으면 한다. 그런 주제들에 대한 수준 높은 책을 만들고 싶다.
또 우리 정신문화의 철도 같은 현대사상에 대한 책을 30여 권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현대과학과 생명에 관한 것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베스트셀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상업적인 책들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한길그레이트북스가 있다. 그런 책들이 나오면 반응이 있고 호응이 있어야 신명이 나는데….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 책이지만 필요한 책은 국가가 공적자금을 투여해서라도 만들어내고 공공도서관에 비치해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는 책을 읽지 않는다. 책 읽는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출판사들도)힘들어하고 있다. (책을 읽지 않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모든 출판사들이 베스트셀러를 찾아 혈안이 돼 있다. 여유 있게 책을 만들 수 있도록 공공 도서관에서 2천 권 정도씩 구입해 준다면 무슨 책이든 잘 만들 수 있다. 또 도서관에 들어가는 책과 일반 책을 구분해야 할 때가 됐다. 도서관 책은 수천 명이 읽는다. 외국에서는 도서관에 들어가는 책은 따로 만들어서 비싸다. 일반 책과 가격이 차이가 난다. 이것부터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교육을 시킨다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일하는 것이 다르다. 평소에 책을 읽고 성찰을 한 사람들은 확실하게 균형이 잡혀 있고 깊이가 있고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출판뿐만 아니라 도서관, 독서운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책 읽는 나라 만들기 국민연대'를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출판문화운동가)의 새로운 운동 방향이다."
-파주출판도시의 탄생도 그런 출판문화운동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한다. 어떻게 책을 만들고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출판인들이 손을 잡고 파주출판도시를 만들게 됐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 번 파주를 도약시켜야 한다.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새로운 독서운동을 해야 할 시점이다.
'출판도시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너무 근엄하다. 독자와 만나러 가야 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한 것이 출판도시에 입주한 출판사의 사옥 1층에 책방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1층을 서점으로 만들어서 '책의 거리, 책의 천국'으로 만들어 독자들이 파주에 오면 책 속에 빠지게 하고 책과 일상적으로 만나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다. 현재 약 40여 개 출판사가 서점을 오픈했다. 100개 이상의 서점을 만들 것이다.
2011년 시작된 '파주북(book)소리축제'는 독자와 저자, 출판인이 함께하는 지식축제다. 파주를 아시아 속에 자리 잡게 하고 아시아 책의 수도를 선언했다. 올해 '파주북어워드'란 상을 만들었다.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를 통해 중국,일본 홍콩 대만 등 동아시아 출판인 간의 소통에도 나서고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있고 인터넷 등 미디어환경이 달라지고 있지만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위기 속에 지혜와 전략이 만들어진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책을 읽지 않고 신문조차 보지 않는다.
"인터넷 시대는 출판의 위기라고 하지만 본질적인 것, 반듯한 지식과 정보는 여전히 '종이책'에 들어 있다. 전자책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1년 더 나아가 10년간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30년이 지나면 우리 공동체는 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질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성장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한국 사회는 그런 점에서 책을 통해 도덕적 재무장을 해야 한다.
진보면 어떻고 보수면 어떤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보나 보수, 그 집단이나 개인이 도덕적이고 정의로운가 여부다.
-한길사의 책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정신사에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우리가 책을 만들고 대화하고 만났던 분들은 한국 현대정신사를 만든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길의 저자들은 정말로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 민족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었다. 함석헌 선생에서부터 송건호, 리영희, 이이화 등 그런 분들을 모시고 책을 만들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자랑스럽고 한편으로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분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과 지식인들의 책을 만든 것은 즐거운 지식축제였다. 책 만드는 것만큼 아름다운 정신의 축제가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지난 36년은 나 스스로 학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길사의 책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다뤘다. 공부하지 않으면 출간하기 힘든 책이었고, 전력투구하지 않으면, 한 시대를 획하는 그런 저자들을 모시고 책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즐거운 고통'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리딩 앤 힐링(reading & healing)이다. 책을 읽고 마음을 치유하고 정신을 반듯하게 세우자는 것이다. 특히 책과 자연을 일치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다. 지금 나의 화두는 '숲'이다. 파주 헤이리의 '북하우스'는 책을 위한 공간이다. 그 북카페 이름이 포레스트(forest'숲)다. 자연과 함께하는 '헤이리'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고민하고 있다. '책 읽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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