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 운영의 새 슬로건이 등장한다. 새 정부가 내거는 슬로건이 보편적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일이 수월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는 데도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슬로건을 일반 대중이나 정책 관계자들에게 익숙한 말로 풀어내야만 정책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라는 것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일견 명료해 보이지만 전략과 정책수단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이 용어의 저작권자라고 매스컴에 소개되는 사람의 말을 들어봐도 기존의 유사한 용어와 무엇이 다른지, 정책적으로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새로 해야 한다는 건지 감이 잘 안 잡힌다.
보편적 의미에서의 창조경제는 창조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제이다. UNCTAD(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는 2008년 연차보고서(Creative Economy, 2008)에서 창조산업으로 디자인, 출판/인쇄/미디어, 시각예술, 문화유적, 전통문화, 공연예술, 시청각산업, 뉴미디어, 창조적 서비스 등 아홉 가지를 들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의 의미는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 비해 한층 폭넓은 것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창조성의 산업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풀이하고 보면 당장 떠오르는 정책 이슈는 '창조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와 '창조성을 어떻게 산업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창조성을 높이는 것'은 미래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한두 해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유아 교육 단계부터 창조적 인간 양성을 위해 국가예산을 상당기간 투입해야 한다. 당장 일자리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진 복지국가 기반 구축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지난 2월 발표된 국정과제의 21대 전략 중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이 이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제대로 실천하려면 유아기에서 사회 진출 시기까지, 나아가 생애주기형 창조성 함양 시스템 구축이 바람직하다.
'창조성의 산업화'는 현 수준의 창조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즉 국민 개개인이 지금 갖고 있는 창조성을 어떻게 잘 엮어내어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가가 핵심이다. 박근혜정부는 최우선 국정목표로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를 내세우고 이를 위해 창조경제 생태계 조성, 중소기업의 창조경제 주역화, 창의와 혁신을 통한 과학기술 발전 등의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의 성패 여부는 국민 개개인의 창조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엮어낼 것인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창조성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개개인의 창조성은 껍질에 갇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껍질을 깨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려면 외부의 자극이 필요하다. 달걀이 서로 부딪치며 부화를 촉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미 닭은 달걀들을 따뜻이 품고 굴려서 맞부딪게 한다. 창조경제 생태계 조성이란 이런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슘페터는 혁신을 '생산요소의 신결합'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를 창조경제에 적용한다면 혁신은 '아이디어의 신결합(융합)'을 통한 신제품, 신기술의 창출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에 관한 34개 국정과제 중 과거 정부의 과제와 차별화되는 것은 'IT와 소프트웨어의 융합을 통한 주력산업 구조 고도화' 정도이다. 그러나 아이디어의 융합은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과학적 창조성, 문화적 창조성, 경제적 창조성을 최대한 살려내고 서로 융합시켜야 한다.
그 실천 방안은 간단하다. 과학기술자, 문화예술가, 기업가들이 상호 소통의 기회를 가능한 한 많이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만나기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목표지향적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 목표는 일자리일 수도 있고, 신제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세계시장에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이폰을 내놓아 21세기 최고의 혁신가로 인정받는 스티브 잡스는 과학기술, 문화, 경제적 창조성을 한몸에 겸비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없는 세상에서는 각 분야별 아이디어들을 잘 융합해내는 것이 혁신의 관건이다.
장재홍/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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