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본인(주인)이 모든 일을 직접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기를 대신할 사람, 즉 대리인을 고용해서 그 일을 맡긴다. 예컨대 국민-정치인, 의뢰인-변호사, 주주-경영자, 원청-하청회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지만 직접 통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인에게 위임한다. 주주는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의 운영을 맡긴다. 경제학에서 발전해서 정치학, 행정학 등에도 자주 활용되는 본인-대리인 이론(principal-agent theory)은 이 양자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대리인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하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본인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정치가들은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일쑤이며, 변호사도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본인과 대리인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으며, 본인보다 대리인이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비대칭성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본인은 끊임없이 대리인을 감시하거나 그들과 이익을 공유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대리인에 대한 감시는 쉽지 않다. 전문 지식을 가진 회계사나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했을 경우, 그들의 행동과 결정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감시가 어려우면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이익을 공유하게 된다. 변호사의 성공 보수나 경영자의 스톡옵션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리인이 반드시 약자인 것은 아니다. 본인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진 대리인은 약자가 될 수 없다.
최근 우리 사회에 본사와 대리점 사이의 불공정한 관계가 화두로 떠올랐다. 본사와 대리점의 관계는 말 그대로 본인과 대리인의 관계이다. 대리점은 본사를 대리해서 판매를 한다. 대리점이 판매를 게을리하면 본사는 망한다. 또 대리점은 직접 접촉을 통해 소비자의 요구를 가장 잘 알고 있다. 대리점은 약자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본사와 대리점의 관계는 본인과 대리인의 관계가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다. 이른바 갑을 관계이다. 갑(본사)은 강자의 입장에서 을(대리점)에게 보이지 않는, 거역할 수 없는 횡포를 부린다. 최근 불거진 밀어내기 등이 그것이다. 을(대리점)은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영업을 계속해야 한다. 이를 학문의 세계에서는 구조적 폭력이라 한다. 청(淸)나라 말기 탐관오리의 폭정과 사회 혼란 속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들은 "굶기는 쉽지만 죽기는 어렵다"는 말을 뇌까리며 새 시대를 기다렸다고 한다. 신해혁명으로 거대한 청제국이 쉽사리 무너진 이유이다. 대리점들도 '쨍하고 해 뜰 날 있겠지'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견디고 있는 것일까. 그 희망마저도 버린 이들은 자살을 선택한다.
본인과 대리인의 관계는 계약으로 맺어진다. 본사와 대리점도 마찬가지다. 본사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적자를 보면 대리점 계약을 해지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리점은 이마저도 자유롭지 않다. 정상적인 계약관계가 아닌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본인과 대리인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노예의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약을 해지하면 위약금으로 전 재산을 날린다. 여기에다 한국 사회만의 독특한 관행인 권리금도 한몫을 더한다. 이래저래 대리점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버틴다. 죽기보다는 쉬운 굶는 방법을 택해서 서서히 고사해가는 것이다. 본사가 요구하면 팔지 못할 물건인 줄 알면서도 받아야 한다. 대리점은 협박과 폭력으로 강매를 당하는 소비자나, 죽는 줄 알면서도 주인의 요구를 거절 못 하는 노예로 전락해버린다.
본인과 대리인의 관계가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변질되어 버린 본사와 대리점의 구조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민얼굴이다. 경제민주화가 왜 필요한지를 알 수 있다. 최근 국제적으로 망신살이 무지갯살 뻗치듯 하고 있는 윤창중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판 강자와 약자의 관계가 국제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턴 여성은 자료 준비 등 윤창중 씨의 역할을 일정부분 대리했다. 그는 저항 못하는 약자가 아니었다.
계명대학 교수, 국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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