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두 고양이를 사랑하는 법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이 속담에 덧붙여 말하자면 그 열 손가락을 깨물었을 때 아픔의 정도는 각기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두 고양이와 함께하며 이 말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더 아픈 손가락은 '편애'라는 말이 떠오르게 만든다.

어릴 때부터 누구든 동등하게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배웠고 그렇기에 당연히 '편애'하는 사람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며 '편애'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 아이가 있으면 그 모든 아이들에게 동등하게 관심과 사랑을 쏟는 것이 맞겠지만 그중에 더 기특하고 착하게 행동하는 아이가 있기 마련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아이에게 더 호감이 가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마음이 생김에도 불구하고 어느 아이에게나 고루 사랑을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이들이 느낄 정도로 티 나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에게도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 대할 때만 걱정하게 될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고양이들을 대하는 것에도 미칠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두 마리를 차별 대우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무래도 더 오랜 세월을 함께한 체셔에게 내 애정이 더 가고 있는 듯 했다. 문제의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바로 저녁식사로 주는 주식캔이었다. 늘 혼자 생활하는 것에 익숙하던 체셔는 맛있는 것을 먹다가 배가 부르면 남겨놓고 다시 와서 먹곤 했다. 체셔의 것을 뺏어가거나 양보해야 하는 상황은 없었다. 그와는 달리 앨리샤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과 늘 먹을 것 경쟁에서 다퉈서 이겨야만 했다.

이렇게 자라온 환경 탓인지 같은 양을 줘도 앨리샤는 늘 후다닥 먹고 체셔의 것을 뺏어먹었다. 경쟁이라곤 해본 적이 없던 체셔는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앨리샤가 얼굴을 들이밀면 자리를 떠버렸다. 새로운 사료를 부어줄 때도 늘 앨리샤갸 먼저 달려와 고개를 내밀어 체셔는 앨리샤가 식사를 끝내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장난감도 마찬가지였다. 던져주는 장난감에 체셔가 달려가려고 자세를 잡는 순간 앨리샤가 먼저 푸다닥 뛰어드는 통에 체셔는 엉거주춤 구경만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덩치 값을 못하는 체셔가 한심해 보이기도 했고 불쌍하기도 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동물 사회에서 중요한 '서열'이 붕괴되지 않을까 우려도 생겼다. 그래서 바로잡아야지 하는 마음에 밥을 줄 때엔 늘 체셔부터 먼저 주고 앨리샤를 나중에 줬다. 처음엔 앨리샤가 먼저 준 체셔의 그릇을 노렸지만 매번 반복하자 더 이상 체셔의 것을 탐내진 않았다. 오히려 체셔에게 먼저 주고 나면 나를 쳐다보며 빨리 달라고 내게 보채기 시작했다. 이젠 새 사료를 부어 줘도 체셔가 먼저 먹고 앨리샤가 기다린다.

하지만 내가 체셔를 너무 챙겨 줬던 게 티가 나서 일까. 내가 체셔와 무엇을 하던 앨리샤는 자다가도 조르르 달려와 우리를 지켜보게 됐다. 체셔를 쓰다듬어 주고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도 예뻐해 달라며 아옹거리며 몸을 뒤집는 것이다. 이런 앨리샤의 모습에 왠지 모를 미안함도 느껴지고 내가 편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감도 생겼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 내 옆의 고양이들에게 손을 뻗어 양손으로 두 마리의 고양이를 만져주다 보면 이게 뭐하는 것인가 싶어 웃음 반, 한숨 반이 나온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걱정하던 '편애'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은 약지가, 어느 날은 중지가 아프듯, 하루는 체셔가 더 신경 쓰이고, 하루는 앨리샤가 더 신경 쓰인다. 하지만 그건 상황에 따라 일시적인 것뿐이다. 단언컨대, 체셔는 앨리샤 만큼, 그리고 앨리샤는 체셔만큼 항상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집 고양이들 역시 이런 내 마음을 알 것이라 믿어본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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