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귀거래

도연명도 젊은 시절에는 자신을 다스리고 백성을 위할 수 있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길을 벼슬살이에서 찾았다. 그래서 관직에 나아갔다. 하지만 41세 되던 때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귀거래사'는 그렇게 하여 세상에 태어났다.

도연명은 노래했다.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가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이미 내 스스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어찌 괴로워하고 홀로 슬퍼만 하랴!' '교제를 그만두고 교유도 끊으리라. 세상은 나와 서로 어긋나 있으니 다시 수레를 타고 나선들 무엇을 구할 것인가. 친척들과의 정겨운 대화에 기쁨을 느끼고, 거문고와 서적을 즐기니 근심걱정 사라진다.'

'무엇을 위하여 황급히 어디로 가겠다는 건가? 부귀는 나의 소원이 아니고 선계는 기약할 수 없네. 좋은 날이라고 생각되면 혼자 나서고, 때로는 지팡이를 꽂아두고 밭 갈고 풀 맨다.'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도 불고, 맑은 물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도 한다. 애오라지 천지자연의 변화를 따라 목숨을 다하니,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귀거래사' 이후 도연명의 삶을 화폭에 담은 그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그림을 '귀거래도'라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귀거래도가 그려졌고, 조선시대에는 유행까지 하였다. 서거정의 문집에도 귀거래도에 붙인 세 편의 시가 실려 있고, 겸제 정선도 귀거래사 전문을 여덟 폭 화면으로 표현한 작품을 남겼다.

그런가하면, 권력 다툼이 치열했던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까지 관직 생활을 했던 이현보는 안동의 고향집에 귀거래도를 걸어두고 살았다. 이처럼 귀거래도가 유행한 것은 벼슬살이 아닌 자연친화적 삶을 참된 인생으로 보는 가치관이 당대에 팽배했기 때문이다. 귀거래사류의 글과 귀거래도류의 그림은 이른바 은일(隱逸) 사상의 표현인 까닭이다.

그런데 그들의 벼슬살이는 요즘과 같은 단순한 공무원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수기치인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그것은 정치를 뜻한다. 즉 귀거래도의 유행은 정치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당대 선비들을 지배했다는 뜻이다. 나는 몇 년째 귀거래도 연작을 그려왔다. 작업을 할 때마다 나는 요 임금이 지방 시찰을 나갔다가 어떤 노인에게서 "임금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말을 듣고는 '백성들이 왕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시절이 태평성대'라고 생각했다는 '격양가' 고사를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판은 오늘도 시끄럽다. 언론에 정치 기사가 보도되지 않는 세상이 진짜 국민행복시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그런 마음을 붓으로 그려본다.

정연지<대구미술광장 입주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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