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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의 소통 "들리나요 손의 말"…'손짓 언어'의 세계

경찰관의 수신호는 신호등 신호에 우선한다. 경찰관들이 교통 수신호를 연습하고 있다. 경북경찰청 제공
경찰관의 수신호는 신호등 신호에 우선한다. 경찰관들이 교통 수신호를 연습하고 있다. 경북경찰청 제공

지난 6월 18일 TV를 보던 축구 팬들은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월드컵 최종예선 한국과 이란의 경기가 끝난 직후 승리를 거둔 카를로스 케이로스 이란 감독이 한국 벤치를 향해 날린 '주먹 감자' 때문이었다. '엿 먹이다'는 뜻으로, 외국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가운뎃손가락 욕'과 같은 표현이다. 케이로스 감독은 나중에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벌금 징계를 받았지만 한국 축구사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손짓 언어는 이처럼 '입'을 대신한다. 사전에 약속이 돼 있거나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면 굳이 부연설명도 필요없다. 선가(禪家)에선 하늘의 달(본질)은 보지 못한 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현실에서는 '손'을 보지 않으면 이해 못할 일도 많다.

◆말 한마디보다 강한 손짓 하나

손짓언어 가운데 대표적인 게 수신호(手信號)다. 청각장애인들의 의사표현 수단인 수화(手話)와 달리 수신호는 어휘와 문법이 없다. 수신호는 또 간단하다. 상황의 제약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금지되거나 주변의 소음 등으로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위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교통정리를 위해 경찰관이 실시하는 수신호나 스포츠경기, 스쿠버 다이버의 수신호를 떠올리면 된다.

얼핏 암호처럼 복잡해 보이는 야구경기의 사인도 키(key) 사인과 취소 사인이 핵심이다. 만약 오른손을 캔슬(최소) 사인으로 정해뒀다면 감독, 주루코치가 아무리 왼손으로 신체, 유니폼, 모자 등 여기저기를 현란하게 만지더라도 오른손 한 번만 움직이면 그전의 사인은 다 의미가 없어진다.

키 사인 역시 경기 시작 전에 정해두지만, 이닝마다 바뀔 수도 있다. TBC대구방송의 프로야구 해설위원인 서석진(55) 전 경북고 감독은 "각 팀의 전력분석관이 경기를 반복해서 관찰하는 만큼 사인이 간파당할 때도 있다"며 "경기 중 사인을 염탐하는 것은 비신사적 행위이지만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각 팀이 애를 쓰곤 한다"고 전했다.

야구 경기에서 심판의 수신호는 1888년 청각장애를 가진 미국 프로야구 선수 더미 호이(본명은 윌리엄 엘즈워스 호이)를 위해 처음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선수가 즉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심판이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거나 몸 가운데서 양옆으로 펼치는 동작을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운동장을 가득 메운 응원 소리를 피해 경기 상황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배구 역시 경기 중 작전 지시가 대부분 수신호로 이뤄진다. 주로 '코트의 사령관'인 세터가 공격수들에게 사인을 전달한다. 상대팀에 보이지 않게 손을 등 뒤로 숨겨 수신호로 전술을 전한다. 어느 손가락을 보이느냐에 따라 좌우, 시간차, 속공 공격 등이 정해진다.

이 밖에 자전거도 고유의 수신호가 있다.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이 단체 라이딩을 할 때 맨 앞에서 달리는 사람이 표시한다. 왼팔이나 오른팔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키면 좌회전 또는 우회전하라는 뜻이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팔을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면 서행하라는 의미이다. 자전거 수신호는 외국에서도 통용되며, 자전거를 탈 때나 운전 시, 보행 시에 기본적인 수신호를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언어적 메시지 함축, 커뮤니케이션 기능

얼마 전 군대 포병들이 쓰는 수신호가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한 방송사의 군대 체험 예능 프로그램인 '진짜 사나이'에 소개되면서다. 출연한 연예인들은 독특한 숫자 호칭법과 몸으로 숫자를 표현하는 포병 수신호를 외우지 못해 가차없이 기합을 받았다. 포병 수신호는 전쟁 시 벌어질 엄청난 소음을 대비한 것이다.

이같이 수신호는 긴급한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군이나 경찰에서 많이 쓰이는 이유다. 일반인들에게도 혼잡한 도심에서 자주 만나는 경찰관의 교통 수신호는 익숙하지만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교통 수신호는 도로교통법이 규정한 경찰관'헌병 등 수신호권자가 운전자나 보행자에게 진행 방법과 정지 등을 명하는 것이다. 신호등 신호와 경찰관 수신호가 다를 경우엔 도로교통법에 따라 수신호가 먼저다.

중앙경찰학교 교수 출신으로 교통 수신호 전문가인 김정일(49'경북경찰청 교통안전계) 경위는 "교통 수신호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거의 없지만 신호등의 역사와 비슷하거나 조금 앞설 것으로 추정된다"며 "단순히 교통정리를 위한 경찰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운전자와 보행자, 교통관리 업무 종사자가 안전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경위가 펴낸 논문 '교통 수신호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교통 수신호는 1961년 12월 31일 도로교통법이 제정되면서 법률로 명문화됐다. 신호 방식도 처음에는 자동차와 마차를 손가락으로 지목, 회전방향으로 이동토록 했으나 손가락으로 지적하는 것이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이유로 지금처럼 손가락과 손바닥 전체를 사용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수신호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직업군은 농수산물시장의 경매사다. 중매인들이 보내는 수신호를 보고,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을 찾아내 낙찰가를 결정하는 역할이다. 갓 거둬들인 싱싱한 상품을 앞에 두고 알 듯 모를 듯한 수지(手指)식 경매 수신호가 오가는 현장은 치열한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제격이다.

하지만 수지식 수신호는 점점 보기 힘든 광경이 되어가고 있다. 대도시에 있는 농수산물 경매 현장에서는 거의 대부분 전자식 경매가 쓰인다. 전자 경매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전자계산기 비슷한 기기를 이용해 입찰가격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방식이다. 23년 경력의 박동희(61) 청도농협 경매사는 "예전에는 전부 수지식 수신호를 썼지만 이제는 산지집하장에서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며 "원래는 중매인들이 자신의 손가락(가격)을 보여줘서는 안 되지만 매일 보는 사람들끼리라 꼭 원칙대로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농협중앙회 경북본부에 따르면 전자경매는 1999년 7월 서울 가락공판장에서 처음 도입됐으며, 북대구 공판장은 2000년 초부터 전자경매를 시작했다.

◆문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생성되는 상징체계

공식적인 수신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란 감독이 내질렀던 '주먹 감자'나 양쪽 엄지를 아래로 향해 맞닿게 하고 나머지 손가락을 역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하트(♥) 모양을 흉내 내는 동작 등은 유래가 불분명하지만 만국 공통의 '보디랭귀지'이다. '사랑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수신호를 누가 고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스타인 가레스 베일(24)은 자신의 '하트 세레모니'로 만든 로고를 상표로 등록해놓기도 했다.

때로는 글로벌한 손짓언어라 하더라도 오해를 살 수 있다. 문화의 차이 탓이다. 2005년 1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은 부시 대통령이 관중들에게 답례로 취한 사인이 논란이 됐다. 주먹 쥔 상태에서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펴는 '황소 뿔'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텍사스 주지사를 지냈던 부시는 취임식장에 있던 텍사스 행진악대에게 친근함의 뜻으로 텍사스의 상징인 황소 뿔을 만들어 보였지만 일각에서는 '악마의 뿔'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악마의 뿔'을 유행시킨 사람은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2010년 숨진 로니 제임스 디오였다. 그러나 요즘은 가수와 청중이 교감을 표하는 수단으로 국내에서도 흔히 쓰인다. 대중매체,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이 보편화되면서 손짓언어의 의미에 변화가 생기거나 변형된 형태로 확산되는 사례다.

한편 수신호를 잘못 이해하면 대형 사고가 나기도 난다. 지난달 31일 발생한 대구역 3중 추돌 열차 사고의 원인은 사고를 냈던 무궁화열차 기관사와 출발 수신호를 담당하는 여객전무의 과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때론 손짓 한 번이 대재앙을 부를 수도 있는 만큼 결코 한눈팔아서는 안될 노릇이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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