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마음 속 흉터

새 달력을 받고 성탄절 카드가 오니 '벌써 한 해가 저무는구나'하는 쓸쓸한 감정이 인다. 받은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기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 카드에 적힌 글을 읽으니 보내주신 분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달력을 보면 논어의 팔일(八佾)편 제17장(章)이 떠오른다. 섣달 초하룻날 천자가 달력을 제후들에게 나눠주면 제후는 이것을 받아 조상의 사당에 소중하게 보관했다가 매월 초하룻날에 양 한 마리를 바치고 사당에서 가지고 나온다는 말이 있다. 달력을 무척 귀중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간직한 듯하다.

20여 년 전 뇌의 송과체에 종양이 생겨 뇌실-복강간 단락술을 시행하고 방사선 치료를 했던 환자가 카드를 보내왔다. "올 2월 28일 자 신문기사에서 '정년퇴임을 맞은'까지 읽고는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3월의 의창 난(欄)에서 학교의 배려로 계속 근무를 한다는 글을 대하고는 소리 내어 웃었답니다"라는 글과 함께 인사가 적혀 있다.

이런 종류의 글을 받으면 두려울 때가 많다. 나는 그녀의 병이 다 나았거나 고정된 상태이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는 그 병을 평생 두려워하며 내가 끝까지 책임져주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해서다. 그녀의 추적 뇌 CT에서 종양이 사라진 자리에 석회(石灰) 침착(沈着)이 있듯이 나도 그녀의 마음속에 굳게 응고되어 흉터처럼 잔존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반월당 지하철역 정거장에서였다. 급하게 화장실로 가는데 누군가 "임만빈 선생님이죠. 저 공무원시험에 합격했어요"라고 어둔한 말로 빠르게 인사를 했다. 언뜻 뒤돌아보니 얼굴은 익숙한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어떤 환자였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 머리를 다쳐 치료했던 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엉겁결에 "어, 축하합니다"라며 대답하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니 그가 없었다. 더 축하해주고 싶어 이리저리 그를 찾았으나 종적이 묘연했다. 어둔한 걸음걸이로 빨리도 사라졌다고 아쉬워하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두 환자의 마음속에 석회 침착처럼 딱딱하게 굳어 잔존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환자와 한 번 만나면 좀처럼 쉽게 녹아내리지 않는 기억을 그들에게 만들어주는구나. 두 환자야 나에 대한 기억이 좋은 것이겠지만 어찌 그런 괜찮은 기억만 만들고 지금까지 의사생활을 해왔겠는가. 평생 뇌를 만지고 산 내 삶이 정말로 아찔아찔한 외줄타기였구나.

옛 사람들이 매달 초하룻날 달력을 사당에서 예를 올리며 꺼내 온 것은 '그달에 남의 마음에 흉터를 만드는 일도, 자신에게 흉터가 생기는 일도 일어나지 말라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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