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백패킹

춥고 고생스럽지만 벅찬 감동과 또 다른 느낌

그곳에 매료되어 망상 속에 꼬리에 꼬리를 물며 괜스레 가슴 부풀게 하던 곳. 그러나 두 번의 실패로 조금은 과장되어 더 많이 미화되고 그래서 조금은 환상이 깃든 그곳으로 백패킹(backpacking:1박 이상의 야영생활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떠나는 등짐여행)을 떠났다.

조금은 바쁘게 달려온 초겨울 오후, 그곳의 들머리는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 6시, 모두 빠져나간 조용한 산기슭엔 적막감과 함께 우리 둘뿐이다. 지금부턴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내려앉은 어둠이 가장 적응하기 힘들다. 아직 어스레한 저녁녘이지만 산은 어둠이 더 짙어 랜턴 불빛에 의지해 산을 오른다.

이제쯤 편하게 걸을 만한 길이 나타날 것도 같은데 그 기다림은 이곳으로의 여정만큼이나 길게 느껴진다. 초겨울 차가운 공기는 코끝을 싸하게 하고 두 뺨을 얼어붙게 하지만 옷깃 사이 깊숙한 등골에선 뜨거운 땀방울이 맺힌다. 조난신고가 있었는지 산 아래부터 들리던 사이렌 소리는 2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울어댄다. 걱정이 근심으로 바뀔 즈음 다행히 사이렌 소리도 멈춘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겹다. 한계에 부딪힐 즈음, 바람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이때 먼저 도착한 백패커들의 반가운 음성이 들린다. 안심이 된다. 이곳이 내가 생각하던, 그리고 내가 그리던 그곳일까. 몸을 가누기 힘든 강한 바람과 어둠 속에서 우리가 머무를 작은 집을 세운다.

작은 텐트 속의 온기가 고맙게 느껴진다. 이대로 잠자리에 들기 아쉬워 밖으로 나간다. 바깥은 몰아치는 바람과 추위에 삼각대를 세우기는커녕 그냥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내려다보이는 야경과 밤하늘의 별빛은 내가 그리던 그곳임이 틀림없다.

오늘의 기억을 추억하기 위해 나름 비싼 소고기도 준비했다. 힘들게 산에 올라오면 뭐든지 맛이 있는 줄 알았다. 컨디션 난조일까? 그냥 모래 씹는 맛이다.

할 일 없는 저녁, 일찍 침낭 속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바람이 야속하다 싶을 정도로 밤새 바람 소리는 더욱 거세다. 밤이 지나가고 바람과 함께 여명이 밝아온다. 그러나 기대했던 운해는 없다. 고요한 새벽, 그 기운에 이끌려 낮은 구릉을 혼자 올라간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골을 흔들 것만 같은 강한 바람 소리뿐이다. 그러나 그곳이 서서히 이국적인 풍경으로 바뀐다. 산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른다. 날마다 해는 떠오르겠지만 그날 그곳에서 떠오른 해는 의미가 있다. 조금씩 밝아지는 세상 위로 태양이 그려준 내 모습을 밟으며 낮은 오르막을 오른다. 초겨울 바람 가득한 그곳에 억새가 있으면 좋고, 이미 철 지난 억새라도 괜찮다.

어느 곳이든 누구는 좋다 하고, 또 다른 누구는 그냥 그렇다 하고, 더러 누구는 실망이다고 하니 같은 곳을 바라봄에도 각자의 시선과 느낌이 다르다. 각자의 걸어온 길이 다르기에 서로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그냥 고집일 뿐이다.

나는 그냥 좋다. 그냥 그곳이라서 좋다. 벅찬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 본 일출의 의미와 강풍'추위에 얼어붙은 뺨의 느낌조차 추억이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다시 이곳을 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이곳은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 우뚝하니 서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곳이 참 좋다. 이곳이라서 참 좋고 이런 모습이라서 참 좋다. 이제 밤새 불어대던 바람과 차가운 기온을 이겨내고 잠시만 허락되었던 여유를 마무리하며 내려갈 준비를 한다. 밤새 머리맡에 올려 두었던 생수가 꽁꽁 얼 만큼의 추위 속에서 따뜻하게 지켜준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조금 더 머무르고 싶지만 초겨울의 그곳을 남겨두고 내려온다.

간밤에 걸었던 길을 다시 굽이굽이 돌아 내려온다. 어둠 속에 미처 보지 못했던 그 산길을 지난다. 그리고 이제는 발 담그는 이 없는 맑디 맑은 계곡물을 지난다. 낮은 언덕은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또한 기억되어 추억이 될 것이다. 다른 시기 다른 날 또 다른 그리움이 되어 이곳을 찾을 날을 기다리며 내려간다.

윤은희(네이버 카페 '대출대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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