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남녀의 투닥거리며 오글거리는 로맨틱 코미디나, 서로 어긋나는 인연 때문에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려 오는 정통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혹은, 가혹한 운명이 서로를 갈라놓는 눈물 젖은 신파 멜로도 아니다.
'런치 박스'는 중년 남녀의 품격 멜로가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도시락을 배달하고, 손으로 쓴 편지로 대화를 나누는, 인도에서 온 아날로그식 로맨스 드라마에는 깊고 넓은 감정 표현이 펼쳐진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인도 영화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한 해에 1천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세계 최대 영화 생산국 인도에서 주류 영화 장르는 뮤지컬이다. 인도의 상업중심지구 '봄베이'(뭄바이의 옛 지명)와 '할리우드'가 합쳐져서 '볼리우드'라 불리게 된 인도 상업영화에는 반드시 춤과 노래, 그리고 로맨스가 있어야 한다. 그간 우리 극장에도 '세 얼간이들' '내 이름은 칸' '블랙' '청원' 등 인도 영화가 심심치 않게 소개되었고, '세 얼간이들'처럼 예기치 않은 빅 히트를 기록하는 일도 있다. 볼리우드 영화는 대개 흥겹고 유머러스하며 교훈적이어서 일단 기본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으며, 특유의 색깔로 인해 엄청나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런치 박스'는 볼리우드 뮤지컬이 아니다. 춤과 노래가 없는 사실주의 드라마다. 무심한 듯 열정적인 감정의 결을 따라 조심스럽게 전개되는 로맨스로서, 폭발되는 감정의 분출 순간 없이도 영화는 다양한 감정의 조각들을 단단하게 이어나간다. 근사한 한 편의 연서라고 해야겠다.
영화의 소재는 도시락 배달원이라는 직업이다. '디바왈라'라 불리는 뭄바이 도시락 배달원은 아내가 만든 도시락을 남편의 직장에 배달하고, 빈 도시락통을 다시 가정으로 배달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 5천여 명의 디바왈라가 활동을 하는데, 미로 같은 뭄바이에서 문맹인 디바왈라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방식인 색과 부호를 조합한 암호 덕분에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수많은 도시락을 정확하게 배달한다. 하버드 연구소에 의하면, 백만 개의 도시락 중 단 한 개 정도만 잘못 배달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바로 이 잘못 배달된 도시락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연한 일이 '런치 박스' 플롯의 단서가 된다.
중산층의 평범한 주부 일라는 소원해진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활력을 불어놓고자 평소보다 신경을 써서 맛있는 점심 도시락을 주문한다. 그러나 그녀의 특별한 도시락은 정년 퇴임을 앞둔 중년의 외로운 싱글 회사원인 사잔에게 잘못 배달된다.
일라는 도시락을 받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잘못 배달된 것을 바로잡는 대신 편지를 넣는다. 두 사람은 도시락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루한 서로의 일상에 위안을 얻는다.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두 사람은 어느새 발전된 사랑의 감정 때문에 커다란 혼란감에 빠진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며 평생 마주칠 일 없는 두 사람에게 우연처럼 찾아온 사소한 사건은 기적처럼 두 사람의 지쳐버린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희망은 엉뚱한 데서 발생하기도 한다. 손으로 쓴 편지, 지나간 1980년대 TV 쇼, 오래된 카페 등은 중년 남녀의 잃어버린 설레는 감각을 끌어올려 준다. 영화는 너무 빨리 흘러가는 세상에서 순간 멈춤으로 그 자리에 서서 걸어왔던 길의 뒤와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가끔씩 천천히 혹은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이 나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라는, 어찌 보면 평범한 메시지가 우리의 지친 감각을 따뜻하게 감쌀 것이다.
이 영화는 칸 국제영화에서 비평가주간 관객상과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외로운 회사원 역의 이르판 칸은 '라이프 오브 파이'와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친숙해진 인도의 대표적인 배우이며, 여주인공을 연기한 님랏 카우르는 오랜 오디션 끝에 행운을 거머쥔 신인으로 극 중의 아파트에서 3개월간 실제로 생활하며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벚꽃 엔딩이 어울리는 이 봄날에 은근하게 깊은 멜로 한 편이 고맙게 다가온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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