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麗末鮮初)의 대학자도 서정성 앞에서는 몸을 사렸던 모양이다. 불교를 숭상하면서 스스럼없이 절을 찾아 스님과 대좌도 했고, 절간이 호텔인 양 잠을 청하기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정의 힘든 일을 잠시 접고 자연을 접한 시인의 마음이 순수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푸른 잣나무, 바람 소리에 따라 노래를 부르는 소나무의 운치 등을 보고 들으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연기 자욱 옛 절 새벽 그지없이 맑은데
이슬 내린 뜰 앞엔 잣나무가 푸르구나
때때로 서늘한 바람이 버들가지 흔드누나.
煙蒙古寺曉來淸 湛湛庭前柏樹靑
연몽고사효래청 담담정전백수청
松韻悄然寰宇靜 涼風時拂柳絲輕
송운초연환우정 량풍시불유사경
【한자와 어구】
煙蒙: 연기를 둘러쓰다, 연기 자욱하다. 古寺: 옛 절. 曉: 새벽. 來淸: 맑다. 湛湛: 맑디맑다. 庭前: 뜰 앞. 柏樹: 잣나무. 靑: 푸르다. // 松韻: 소나무 운치. 悄然: 초연하다. 寰宇: 세상, 진세. 靜: 고요하다. 涼風: 서늘한 바람. 時: 때대로. 拂: 흔든다. 柳絲: 버들가지. 輕: 가볍게.
'소나무 운치는 초연하여 고요한 세상이네'(宿甘露寺)로 제목을 붙인 칠언절구다. 작자는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으로 이성계의 새 왕조 창업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개국 후 제도정비에 힘썼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연기 자욱한 옛 절 새벽은 맑기만 하고 / 이슬 내린 뜰 앞에 잣나무는 푸르구나 // 소나무 운치는 초연하여 세상은 고요한데 / 서늘한 바람만이 때때로 가볍게 버들가지를 흔드누나'라고 번역된다.
위 시의 제목은 '감로사에 묵으면서'로 번역된다. 조선에 개국 되고 세상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작자가 감로사를 찾아 하룻저녁을 묵으면서 자연에 취했던 것이 시적인 배경이 된다. 감로사는 소동파 시선이나 김부식이 차운한 시문에서 보이는 절이기도 하지만, 부산'창녕에도 있는 절이다. 작자가 찾는 감로사는 송도에 있는 고찰로 한자의 뜻대로 보면 멋진 운치를 더한다.
시인은 감로사에 묵으면서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시상을 일으킨다. 맑은 새벽 공기에 취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잣나무의 늘어진 가지를 보게 된다. 이슬을 받아 머금고 축 늘어진 모습이 소나무와 더불어 운치를 더했던 모양이다.
화자는 자연이 주는 운치 속에 고요한 함성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끄러운 세상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초연한 느낌까지 받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서늘하게 부는 바람 한 줌이 버들가지뿐만 아니라 화자의 마음도 뒤흔들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양촌 권근(1352~1409)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신이다. 일찍이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그의 수제자인 정몽주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1368년(공민왕 17년) 17세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됐다. 1374년(공민왕 23년) 성균관 직강(直講), 예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됐으며,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정도전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되자,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1393년(태조 2년) 정총(鄭摠)과 함께 정릉(定陵)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가 됐다. 태조는 이천시 율면 산성리 정문말에 권근을 찾아와 임금님 바위에서 권근과 정치적인 담론을 했고, 조선왕조에 협조를 거부하던 권근은 절의를 굽혔다는 이야기를 들어면서도 새 왕조에 협력했다. 명나라 태조가 자기에게 바치는 글인 찬표를 잘못 썼다며 그 글을 쓴 정도전을 잡아들이라고 할 때, 정도전을 대신해서 자진해 해명하러 명나라에 갔고, 극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 됐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은 한국 최초로 그림을 넣어 학문을 설명한 책으로 후에 이황에게 큰 영향을 줬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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