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같은 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극소수이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더 위험한 존재는 보통 사람들, 어떠한 문제 제기도 없이 믿고 명령을 따르는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대계 이탈리아 화학자이자 작가인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 경험을 기록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저서에 나오는 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자들은 처음부터 고문자나 악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유대인 절멸 계획인 '최종해결책'의 실무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장 프란츠 슈탕글, 알제리 해방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와 미국 군인 모두가 평범한 인간이었다.
이 같은 '불편한 진실'은 훗날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전범 재판을 방청한 크로아티아 언론인 슬라벤카 드라쿨리치에 의해서도 재발견된다. 내전 당시 20세 중반이었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 고란 엘리시치는 포로로 잡힌 이슬람교도 13명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한 죄로 40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산뜻하고 정직한 청년'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주 잘 자란 청년' '파리 한 마리 해치지 못할 사람'(드라쿨리치의 방청기 제목이다)이란 것이었다.
이런 발견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이스라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고 쓴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이미 소개된 바 있다.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광신적 반유대주의자도, 악마에 씐 정신 이상자도 아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평범한 하급 관료일 뿐이었다. 이런 관찰을 통해 아렌트가 이끌어낸 결론이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다.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책이 나왔다.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다. 요지는 '아이히만은 철저히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였으며 "예루살렘 재판에서 속마음을 숨긴 채 어수룩한 관료인 것처럼 연기를 했을 뿐"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확신범이란 것인데 누구의 말이 맞는가? 우리도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타고난 악인은 따로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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