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베즈프리조르니예

러시아 혁명 이후 적'백 내전은 인민들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경작지의 3분의 2가 버려졌고 식량 부족으로 사람들은 인육을 먹었다. 이런 한계 상황은 집을 잃고 떠도는 엄청난 수의 고아를 만들어냈다. 이들을 '베즈프리조르니예'라고 하는데 1922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그 수는 무려 700만 명에 달했다. 이후 1930년대에도 강제 농업집단화로 또 한 차례 베즈프리조르니예 세대가 생겨났다.

이들은 무리지어 다니면서 살인과 강도로 먹고살았는데 이들 어린 떼강도는 신생 사회주의 러시아에 큰 위협 요소였다. 그래서 KGB의 모체인 '체카'(Cheka)의 설립자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소년범 형무소인 '제르진스키 노동 코뮨'을 만들어 이들을 가뒀다. 이들 중 충성심 시험을 통과한 일부는 체카의 후신인 내무인민위원회(NKVD) 요원으로 발탁됐고 그중 일부는 농업집단화의 선봉대가 됐다.

북한에도 베즈프리조르니예가 있다. 바로 '꽃제비'이다. 꽃제비라는 명칭의 유래는 유랑, 유목, 떠돌이란 뜻의 러시아어 '꼬체비예'가 북한에서 '꽃제비'로 오기(誤記)되어 정착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8'15 광복을 전후한 시점과 6'25전쟁 이후에 꽃제비가 많이 생겼으나 북한 당국이 관리하면서 줄어들었다가 1985년 이후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다시 늘어났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이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정할 수는 있다. 꽃제비 출신으로, '요덕스토리'라는 영화로 잘 알려진 탈북 영화감독 정성산 씨에 따르면 북한의 300만 소년단 가운데 절반인 150만 명 정도가 꽃제비일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떼로 몰려다니며 살인과 강도를 일삼았던 베즈프리조르니예와 많이 닮았다.

전국을 쏘다니며 '종북 콘서트' 논란을 빚고 있는 재미교포 신은미 씨의 코미디 같은 언행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급기야는 잘못된 항의 방식이지만 그를 향해 인화물질과 번개탄을 투척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꽃제비의 존재는 북한식 사회주의와 3대 세습체제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신 씨도 이들의 존재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구제불능의 자기 기만에 빠진 그가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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