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는 골목길 도시다] <9> 오래된 작은 골목 (상)

서성로 돼지골목.
서성로 돼지골목. '8번식당'과 '이모식당'이 서로 마주 보고 있고, 그 옆에 '밀양식당'이 있다.
동성로 통신골목 뒤편 저렴한 먹을거리 골목.
동성로 통신골목 뒤편 저렴한 먹을거리 골목.
중앙로 쟁이골목. 제일 안쪽에 펍 겸 라이브클럽
중앙로 쟁이골목. 제일 안쪽에 펍 겸 라이브클럽 '쟁이' 입구가 있다.

어떤 길을 골목이라 부르려면 그 규모는 최소한 어느 정도여야 할까? 대구의 경우 큰 골목으로는 여러 개의 골목이 합쳐진 거대한 골목 동성로나,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처럼 큰 시장통 골목이 여럿 있다. 이렇게 크지는 않더라도 안지랑 막창골목, 평화시장 닭똥집골목, 대신동 미싱골목처럼 동종업계 점포가 적어도 10여 곳 넘게 모여 있어야 할 것도 같다. 그런가 하면 진골목이나 김광석길처럼 비교적 아담한 사이즈의 골목들도 저마다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번에 살펴볼 골목들은 이러한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작은 골목들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웃 가게들이 하나 둘 떠나며 골목 규모가 축소된 곳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또 찾아와 준 사람들 덕분에 이름을 잃지 않고 있는 골목들이다. 요즘 새로 생겨나는 이런저런 골목들의 조상 골목이라고 봐도 되겠다. 또한 골목이 존립할 수 있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에서 배워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의 힌트도 던져 준다. 그런 골목 몇 곳을 다녀왔다.

◆학생들 상대로 어떻게 가격을 올려요?

옛날짜장면 2천500원, 소고기국밥 2천500원, 볶음밥+미니짬뽕 3천500원, 수타돈까스 3천800원, 돈까스 두 개를 주는 더블돈까스 4천원, 탕짜면(탕수육+짜장면) 6천원.

어디 가서 십수 년 전 식당 메뉴판을 발굴한 것일까? 아니다. 지금 당장 가서 사 먹을 수 있는 음식 가격이다. 어떤 메뉴는 시중 다른 곳 가격의 반값 정도다. 사실 짜장면 한 그릇에 2천500원은 통계청 생활물가지수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형성됐던 가격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메뉴는 탕짜면이다. 혼자 가서는 주문하기도 무안하고 먹기도 민망한 메뉴인 탕수육을 짜장면과 함께, 저 놀라운 가격에, 그것도 당당하게 맛볼 수 있다니 말이다.

이처럼 저렴한 메뉴를 구비한 식당들이 모인 골목이 대구에 있다. 그것도 대구 도심 한복판인 동성로 통신골목 뒤편에 있다. 1만원이면 둘이 가서, 잘만 메뉴를 고르면 셋이 가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 여러 곳이 모여 있다. 이 골목에 붙은 이름은 아직까지는 없다.

'행복반점'에는 특이한 메뉴가 있다. 중화요리를 파는 식당인데도 메뉴판에 생뚱맞게 적혀 있는 돈까스다. 인근 경찰직 공무원 학원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합격돈까스'라는 별칭으로 통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메뉴에 만두를 2개씩 얹어 준다. 돈까스에도, 짜장면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행복반점 주인아주머니는 "학생들이 많이 온다. 그런데 오이나 계란은 못 먹거나 편식을 해서 남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만두를 고명처럼 얹어주고 있다. 만두는 다 잘 먹더라"고 했다. 음식 가격이 왜 이렇게 싼지 묻자 아주머니는 "하루 두 끼는 밖에서 사 먹으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온다. 몇 백원 올려도 이들에게는 큰 부담이다"고 했다.

이웃에 있는 '분식전문점 공간'은 문을 연 지 12년이 넘은 곳이다. 이곳 역시 그동안 음식 가격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분식전문점 공간 주인아주머니는 "인근 여러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물론 길을 지나다 저렴하게 배를 채우려는 청소년들, 심지어는 주변 증권사에 소액 주식 거래를 하러 온 개미 할아버지들도 찾는다. 모두 가격을 500원만 올려도 민감해할 사람들"이라고 했다.

대신 물가는 상승하고 가게 임대료도 올라 식당 운영에 어려움이 많단다. 아주머니는 "5년 전만 해도 아줌마 두 명, 아르바이트 학생 두 명과 함께 바쁘게 일했다. 지금은 바쁜 점심 및 저녁 시간대에만 아줌마 한 분과 함께 일한다. 이곳 골목에 있는 다른 식당들도 부부 둘이서 겨우 운영을 하고 있고, 평일에는 일찍 문을 닫는 등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그래도 당분간 문을 닫을 생각은 없다"며 "가끔 음식값이 너무 싸서 음식을 제대로 주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식당들처럼 국산 재료를 쓴다. 대신 남는 이윤이 적을 뿐"이라고 했다.

◆대구 돼지국밥의 뜨끈한 역사 맛볼 수 있는 곳

겨우 식당 세 곳이 모여 있는데도 고유한 이름을 지니고 있는 먹을거리 골목이 있다. 대구 돼지국밥의 발상지로 거론되는 곳, 서성로 '돼지골목'이다. 돼지골목은 돼지고기를 맛볼 수 있는 '돼지고기 골목'의 줄임말로 시작됐고, 지금은 아무래도 돼지국밥이 간판 메뉴인지라 '돼지국밥 골목'으로 먼저 통한다. 물론 순대와 수육 등 돼지고기를 활용한 다양한 메뉴의 인기는 여전하다.

'밀양식당'은 1950년대 중반, '이모식당'은 1970년대, '8번식당'은 1976년에 문을 연 것으로 식당마다 각각 밝히고 있다. 물론 그 앞 시기에도 돼지골목은 존재했고, 식당 여러 곳이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이제 세 곳만 남은 것이다. 밀양식당에 붙어 있는 한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대구 돼지골목은 1940년대에 있었던 '서성옥'이 원조 식당이다. 돼지골목은 대구역과 인근 쌀 도매상을 오가는 짐꾼들이 들락거린 곳이고, 공구상가가 형성된 이후에는 노동자들도 많이 왔다.'

세 곳 식당 중 인터넷 블로그나 SNS 등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8번식당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와대가 있는 서울에서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성묘를 가는 길에 필요한 돼지고기를 사서 가며 유명세를 탔다. 이후 상가, 잔칫집, 야유회를 가는 회사 등에서 수육을 대량으로 떼어가는 곳으로 인기였다. 이러한 역사를 증명하듯 벽에 걸린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 등의 친필 사인도 볼거리다. 현재 어머니와 아들, 2대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아침에 일찍 가면 갓 손질을 한 뜨끈한 돼지 간이며 허파 등을 작은 접시에 담아 서비스로 내어 주기도 한다.

◆대구에서 가장 작은 골목, 청년 예술가들의 오래된 사랑방

이름이 붙은 골목 중 대구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골목이 도심 속에 있다. 대구 중앙로 NH농협은행 대구중앙지점 옆에 있는 '쟁이골목'이다. 스무 걸음 정도면 골목 입구부터 끝까지 갈 수 있는 이 골목에 있는 가게는 단 두 곳. 카페 겸 갤러리 '도요'와 이 골목에 이름을 선사한 펍(pub, 선술집) 겸 라이브클럽 '쟁이'다.

쟁이는 1994년에 문을 열었다. 20여 년 동안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가게 안팎 자유분방한 감성의 그림, 낙서, 인테리어는 처음 그대로고, 대구의 밴드 음악 마니아들이 아지트 삼아 찾도록 만든 록, 재즈, 블루스 등의 일관된 음악 선곡도 여전하다.

이곳은 어둡다 못해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사람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칠흑 같다고 표현해야 할 만큼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이다. 저렴한 술값도 젊은이들을 끈다. 쟁이는 전국적으로도 인지도가 있다. 대구를 찾는 록 뮤지션들이 들르고 수시로 공연도 한다. 또 쟁이는 신진 뮤지션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오픈마이크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쟁이와 비슷한 시기인 1996년에 문을 연 대구 남구 대명동의 클럽 '헤비'와 함께 대구에서 생기 넘치는 록 음악 공연을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다.

쟁이가 단지 '음악'과 '술'로만 청년들의 발길을 골목으로 모아 온 것은 아니다. 특히 청년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시도를 모의 및 실행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대구의 청년 예술가들이 입을 모아 "대구의 인디음악, 청년 미술, 독립영화 등이 태동한 곳이다. 청년 예술가들이 모일 곳도, 작품 활동을 펼칠 곳도 마땅히 없던 시기에 쟁이는 지역 청년예술의 성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정도다. 가게 한 곳이 능히 골목 이름을 차지할만하다.

글 사진 황희진 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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