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영남문화재연구원 박승규 원장

"대구경북, 선사시대부터 동북아 문화 교류의 허브…자부심 가질 만하죠"

"선사시대 대구경북은 대륙과 일본을 연결하는 허브였습니다." 영남문화재연구원 박승규 원장이 연구원 수장고에서 가야 토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태욱 기자 woo@msnet.co.kr

문화재 유적지 조사 1천400여 건, 국내 최다 발굴, 한국 최초 문화재연구원 설립(창립회원), 한국 문화재 발굴의 산증인. 영남문화재연구원(이하 영문연) 박승규(58) 원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많다. 제대로 된 매뉴얼 하나 없었던 우리나라 발굴 현장에서 '표본 조사제'라는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도, 대규모 택지지구에 '조사 사업지구 전면시굴제'를 정착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발굴 성과, 업적으로 영역을 넓히면 박 원장의 존재감은 더 커진다. 고령 대가야 고분군, 경산 임당고분군 생활유적지, 시지'노변 사직단 터, 경주 모량'방내리 유적지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세상 밖으로 나왔다.

30년간 호미질, 솔질, 체질은 원도 한도 없이 해보았다는 박 원장. 최근 그의 관심은 '대중 고고학'에 꽂혀 있다. 고고학 유적을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 역사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일단 일을 벌이고 나니 주변에 많은 협력자들도 생기고 지역 주민들도 내 일처럼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발굴꾼, 고고학자에서 대중 고고학자로 변신을 모색하고 있는 그를 영문연 사무실에서 만났다.

◆합천 옥전고분군 발굴하며 고고학 매료

1986년 경남 합천 옥전고분군 발굴 현장. 박승규 연구원의 손끝에 이상한 마구(馬具)가 감지되었다. 솔질을 통해 드러난 것은 5점의 말투구(馬胄)였다. 그동안 마구류는 동북아에서 문화의 전파 경로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였다. 말투구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3점의 출토 사례가 보고되고 있었다. 한국은 부산에서 1점만 출토된 상태.

일본에서는 오타니(大谷)고분 출토 사례를 근거로 한반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 왔었다.

"옥전고분군의 말투구는 일본보다 시기적으로 빠르고 완성도에서도 훨씬 뛰어났습니다. 합천은 당시 가야연맹의 일원이었는데 이런 소국에서 5점이나 나왔으니 일본 고고학계의 주장은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 거죠. 지금도 임나일본부설은 문헌사학에서는 논쟁을 거듭하고 있지만 적어도 고고학계에서는 합천 옥전고분 발굴 이후 논쟁이 종식된 상태입니다."

동북아 역사 판도를 들썩였던 옥전리 발굴은 학부생이었던 한 청년을 고고학도로 이끌었다. 그 후 그는 영남지역 1천400여 현장을 누비며 발굴 작업에 몰두해 왔다.

어느덧 발굴 인생 40여 년. 유적지에서만 그의 역할이 빛났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존재감은 문화재 조사 현장에서 더 빛났다. 발굴 행정이 주먹구구식으로 집행되던 시기, 문화재 발굴법, 규정이 그의 노력으로 하나씩 만들어졌다. 박 원장은 초창기 대규모 택지지역 발굴을 시작하면서 건설업자, 공무원들과 수도 없이 부딪쳤다. 공기(工期)가 곧 돈인 그들에게 발굴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대충 하면 안 되냐"며 거액의 봉투를 보내기도 하고 수시로 술자리로 불러내 회유를 하기도 했다. 이런 폐단이 법 규정과 제도의 미비에 있음을 간파한 박 원장은 발굴에 필요한 제도'장치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표본 조사제'와 '사업지구 전면시굴제'였다. 이 덕에 건설업자와 관료들 손에서 재단(裁斷)되던 고고학이 전문가들의 손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 민간 발굴 전문기관 출범

박 원장의 고향은 경상북도 청도. 청소년기부터 우리 지역 고대, 고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경상대 사학과에 진학한 것도 '청도 이서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고대 문헌 사료에 집착하던 그가 고고학에 뛰어든 계기는 1985년 삼천포 늑도 발굴 때부터였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발굴 현장에 몸담으면서 대학원, 학예연구사를 지내는 10여 년 동안 대구경북은 물론 부산경남 30여 곳의 발굴에 참여했다.

'발굴 인부'였던 그가 전문 고고학자로 발돋움하게 된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1994년 영남고고학회가 국내 처음으로 영남문화재연구원(영문연)이라는 발굴 전문 기관을 설립한 것이었다.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을 넘나들며 실무 경험이 풍부했던 박 원장은 초창기 멤버로 영문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문연 설립 이후 대학의 고고학과, 박물관, 문화재연구기관에 집중됐던 발굴사업이 민간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발굴 수요가 늘어나면서 초창기 비즈니스로서의 고고학도 발전을 거듭했다. "연간 우리가 벌인 발굴사업이 50~100건을 헤아렸으니 22년간 총 1천500곳을 발굴한 셈입니다. 한국 고고학계로서는 한강 이남, 이북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입니다."

이 과정에서 손에 꼽을 수조차 없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영문연의 손을 거쳐 흙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문화재 기관이나 대학 고고학과에서 엄두도 못 내던 대규모 택지사업지구에 맨 처음 발굴 푯대를 꽂은 것도 영문연이었다.

◆고령 대가야'임당고분군 등 1천500여 곳 발굴

주택가 두세 평짜리 옹관묘부터 수백만 평 택지지구 발굴까지 대구 경북에서 박 원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드물다. 이 중 박 원장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발굴이 있다. 고령 송림리 가마터가 그곳이다.

그동안 가야 토기는 서부 경남은 물론 호남 지역에서도 출토돼 그 유통 경로가 학계의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송림리 가마터에서 가야 토기 '원형'이 발견됨으로써 그 비밀이 풀렸던 것이다. "당시 송림리는 대가야의 국가산업단지, 수출 물류기지였던 셈입니다. 그만큼 부산경남에서 호남 일부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가야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주변국을 압도했었다는 이야기죠." 이 밖에도 대구 팔달동, 포항 옥성리, 상주 신상리, 대구 동천동 등 수많은 유적지들이 영문연의 발굴을 통해 학계에 알려졌다.

최근 박 원장이 주목하는 분야가 있다. 고대사에서 대구경북의 역사적 위상이다. 특히 국제 교류와 관련해서다. "신석기, 청동기시대 이미 한중일 교역 루트가 열려 있었습니다.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선사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해양으로 뻗어 가는 중심에 대구경북이 있었던 거죠. 내륙 루트든 해양 루트든 대부분 길은 낙동강 유역으로 통했던 거죠. 대구경북이 선사시대부터 동북아 문화의 터미널로 기능했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껴도 될 듯합니다."

이제 박 원장은 이제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성과를 하나씩 학술적으로 '집약'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대구경북 고분군의 학술적 규명을 통해 세계문화유산 등록 작업도 구상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연구원에서 '내 고장 유적탐험대' '어린이 발굴학교'를 추진하며 고고학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딱딱한 서가(書架)에 갇혀 있던 고고학을 시민들이 즐길 수 있도록 펼쳐 놓는 일, 최근 그가 천착하고 있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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