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오빠를 장가보내다
오빠는 박사리 박태촌 댁에 머슴을 살았어. 우리 집은 대동 숲골이고. 오빠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어. 그 집 주인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거든. 우리 마을에도 빨갱이들이 골목에 서성거렸어. 그러나 우리 마을 사람은 해코지하지 않더라고. 아버지가 마당에 나오더니 "거랑 건너 박사동이 불바다가 됐네. 양근이가 무사할지 모르겠다"며 큰오빠와 함께 박사동에 가는 거야. 정미소 앞 막다른 골목에서 죽은 아들을 발견하고 사다리에 얹어 모시고 왔어.
"돌아가신 오빠를 직접 보셨는지요?"
"봤지. 허연 무명베 옷이 피로 칠갑되었어. 차마 볼 수가 없겠더라고. 그 뒤로 오빠 모습이 꿈에 자주 나타나 잠을 설치곤 했지. 참혹한 오빠 모습을 머릿속에 지워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보지 말아야 좋았을 것을. 오빠는 가슴과 등에 칼을 맞았어. 아버지는 몇 날 며칠을 꺼이~ 울더군."
"장가도 못 간 오빠가 죽었으니 슬픔이 컸겠군요?"
"당연하지. 오빠가 죽고 난 뒤, 우리 집에는 우환이 끊어질 날 없었어. 엄마가 유명한 점쟁이에게 물어보았어."
"불쌍한 우리 오빠가 '몽달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며 장가를 보내줘야 한다"고 점쟁이가 말했어. 엄마는 있는 돈 없는 돈 긁어모아 굿판을 벌였지. 짚단으로 신랑'신부 형상을 만들었어. 여느 혼례처럼 초례상엔 음식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암'수탉을 올려놓았어. 무당은 이 귀신 저 귀신 세상에 모든 귀신 청해 놓고, 우리 오빠 좋은 색시 만나 잘 살게 해달라며 얼쑤~춤사위를 벌이더군. 대나무를 쥔 사람은 무슨 신을 받았는지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 그렇게 오빠는 부부의 연을 맺게 했어. 신부는 어느 집 처녀 귀신인지 모르지만."
"굿판을 보면서 어떻게 하셨나요?"
"나도 돈 한 닢 놓고 빌었어. 우리 오빠 꿈에 나타나지 아니하고, 우야든동 하늘나라에서 잘 살게 해달라고." 엄마는 아들의 무덤에 자주 갔어. 어느 날, 야시(여우의 경상도 방언)가 묘를 온통 파헤쳐버린 거야. 야시는 오빠의 시신을 해코지는 않았지만, 무명베 바지는 갈기갈기 찢어 놓았어.
그 시절, 여우의 개체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무덤에 해코지했다는 말은 확실하다. 증언 중, 여러 곳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생태계도 많이 변했다. 그렇게 많던 늑대와 여우, 산토끼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 산돼지, 고라니는 부쩍 불어났다. 산돼지는 고구마 감자밭을 휘젓고, 심지어 사람까지 해친다. 고라니는 콩'채소'과일 농사를 망쳐놓기 일쑤다.
#9. 사망자 박양근 20세. 여동생 박순연. 대구 동구 능성동
큰아들은 박사사건에 죽고, 작은아들은 6'25전쟁에서 죽었다
사망자 박일도는 나의 9촌 아재이다. 증언한 박기정은 10촌 형님이다.
"형님, 그날 일을 아는 대로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친구 김재수(뽕나무할매 집) 어른 집에 놀러 갔어. 두 살 먹은 동생 기돈이를 데리고. 그 어른이 오랫동안 밖에 머물다 그날 집에 돌아왔어. 놈들은 작전대로 사람이 많이 모인 사랑방을 급습했고, 불이 켜진 집을 차례로 뒤졌어. 아버지는 김재수 어른과 함께 붙들렸어."
"여보 임자!" 아버지는 담 너머로 동생을 어머니께 넘겨주고, 정미소 마당에 끌려갔어. 그 어른 집과 우리 집은 담 하나 사이야. 아버지도 여느 사람처럼 우리 집 들어오는 골목에서 전신을 난자당했어.
"직접 목격한 것은 있었는지요?"
"할배가 피범벅이 된 아버지를 머릿방에 눕히고, 솜이불, 솜옷을 닥치는 대로 찢어 상처 부위를 동여매더군. 아버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어. 출혈이 심했겠지. 요즘 같으면 구급차를 불러 손을 써 볼 수도 있었을 터인데. 부상자가 연방 우리 집으로 피신해 오더라고. 우리 집이 막다른 골목이잖아. 어머니는 피가 범벅이 된 최천암 어른의 상처를 옷가지를 찢어 싸맸어. 배암구 어른과 박영생 형님도 우리 집으로 쫓겨 와 뒷담을 타 넘더라고. 할배는 배암구 어른을 짚동에 숨게 했어. 얼마 안 되어 그분도 숨졌지. 출혈도 많았지만, 명치를 찔렸다 하더군. 짚북데기에 숨어 있던 최천암 씨는 지서로 도망쳐 살았어. 할배는 아들의 시신을 방에 눕혀 놓은 채, 이웃집 불을 끄더라고."
"아버지의 장례는 어떻게 치렀는지요?"
"집안에 여러 명이 변을 당하고, 동네가 쑥대밭이 됐으니 일손이 없었어. 어머니가 다니는 '금호교회 교우'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렀어."
할아버지의 큰아들은 박사 사건에 목숨을 잃고, 작은아들 박창희는 6'25 때 전사했다. 한두 해에 걸쳐 두 아들을 잃었다.
#10. 사망자 박일도 33세. 장남 박기정 7세. 박사리
한 달 뒤면 사위를 봤을 터인데
사망자 박한태는 나의 큰아버지다.
"나는 기억이 전혀 없어. 아버지를 사다리에 얹어 산으로 간 것 외에는. 다리가 상여 역할을 했어." 아들인 박기보의 짤막한 진술이다.
경기도 포천에 사는 맏딸의 이야기다.
"나는 그때 결혼 날짜를 받아 놓고 있었어. 중매쟁이 말만 듣고 혼인 결정을 했지. 신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채 시집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이모 집(배동술, 동장)에 놀러 갔어. 그날은 상현달빛이 마을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어. 김장도 하고 한가했지.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빨갱이들이 들이닥친 거야. 이모 아재가 동장인지라 맨 먼저 습격했을 것 같애."
"간나새끼, 어디 숨었노?" 지껄이며 집에 불을 지르더군. 허겁지겁 집에 돌아왔어. 머릿방에는 이미 아버지의 시신이 눕혀 있었고, 얼굴엔 보자기를 씌어 놓았어. 집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더라고."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을 보셨는지요?"
"아니야, 할배가 못 보게 했어. 내가 명색이 맏딸인데…. 할배가 좋은 일 앞에 두고 못 보게 한 모양이야. 돌아가신 아버지를 작은아부지(박한조, 작가의 아버지)가 업고 왔대. 아부지는 키가 장성처럼 컸지만, 작은아부지는 몸피가 작잖아. 우예 업고 왔는지…. 삼촌의 바지저고리에도 피가 칠갑이 됐더라고. 아부지의 시신을 앞에 두고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 그 사건으로 우리 집안은 풍비박산 났지. 구촌 아재 돌아가시고, 당숙도 전신이 칼에 찔려 도립병원에 이송 갔잖아. 아부지는 관도 없이 초식 자리를 덮고 사다리에 얹어 묘터에 갔어."
"나는 한 달 뒤, 동짓달 열이튿날 시집갔어. 초례상 앞에 두고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지데. 신혼 방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흘린 눈물이 한 바가지는 됐을 끼라. 아버지는 사건에 돌아가시고, 일 년이 안 돼 둘째 삼촌은 6'25전쟁에 돌아가시고, 막내 삼촌은 후유증으로 정신을 놓았지. 너희 아버지가 죽을 고생 했어. 큰집'작은집 농사 도맡아 짓는다고."
큰아버지는 저자를 친아들처럼 사랑했다. 위로 줄줄이 딸만 생산하다 아들인 조카를 보았으니. 돌아가신 날도 나를 안고 얼러주었다고 했다.
#11. 사망자 박한태 38세. 아들 박기보 6세. 맏딸 박옥량. 경기도 포천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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