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최순실과 개헌 만사형통론

'최순실 게이트'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 엄청난 흡인력에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을 덮기 위해 끌어들였던 '개헌 논의'라는 '블랙홀'도 빨려 들어갔다. 지금은 개헌론자 그 누구도 개헌을 말하지 않는다. '최순실 블랙홀'의 엄청난 에너지를 감안하면 개헌은 당분간은 '웜홀'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개헌론자들은 어떻게든 '웜홀'을 뚫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최순실 게이트가 바로 개헌을 해야 할 명백한 이유라는 것이다. 최 씨 문제가 얼마나 갈지 지금으로서는 예측 불능이지만 어쨌든 해결의 가닥이 잡혀가기 시작하면 개헌 소리는 다시 사방에서 나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 개헌 논리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개헌론자들의 논리는 두 가지를 축으로 한다. 현행 헌법은 개정된 지 30년이 넘어 그동안의 경제'사회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87년 체제 한계론'과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론'이다. 이로부터 명쾌한 해법이 도출된다. 현행 헌법은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갖고 있다. 따라서 헌법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참으로 편리한 환원주의다.

과연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헌법 때문일까. 노태우정부 8.6%, 김영삼정부 7.1%, 김대중정부 5.0%, 노무현정부 4.3%, 이명박정부 3.3%로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경제성장률은 헌법을 바꾸면 다시 예전처럼 치솟아 오르나? 그래서 '헬 조선'이 '헤븐(heaven) 조선'으로 바뀌나? 아이 낳지 않는 젊은 부부들이 갑자기 아이를 쑥쑥 낳게 되나? 이렇게 각론으로 들어가면 헌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란 주장은 금방 무너진다. 경제 문제 하나만 들어보자. 경제 활력 저하가 헌법 때문이라면 가장 '나쁜' 헌법에도 경제는 너무나 좋았던 5공의 '호시절'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제왕적 대통령'론도 그렇다. 최순실 국정 개입을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으로 보는 것은 개념의 혼란이다. 대통령이 제왕이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칠칠치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개헌론자의 논리대로라면 제왕적 대통령제를 혁파하려면 검찰과 경찰을 대통령의 관할권 밖으로 옮겨야 한다. 대통령이 검찰과 경찰을 지배하고 침묵시켰으니까. 내각제를 해도 마찬가지다. 총리에게서 사정 권력을 떼야 한다. 그러면 어디로? 국회로? 대법원으로? 삼권분립이란 민주주의 대원칙상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정치 체제의 문제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권력이 더 센가 의회 권력이 더 센가? 문자 그대로 제왕적 대통령이라면 물론 입법, 사법에 입김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야당의 협조 없이는 대통령은 법안 하나 마음대로 통과시키지 못한다. '제왕적'이란 관형어의 정확한 위치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란 단어 앞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맞다고 치자. 그러면 권력을 나누고 쪼개면 만사형통인가? 그렇지 않음은 역사상 최상의 헌법이란 평가를 받는 바이마르 헌법이 잘 보여준다. 바이마르 헌법은 그야말로 권력을 나누고 쪼갰다. 단 1명의 의원만으로도 정당을 대표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결과는 의회 내 다수당 형성의 불발과 극심한 정치 불안이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바이마르 헌법이 추구하는 의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대통령의 전제정치를 불러왔다. 의회가 기능을 하지 못하면 대통령은 툭하면 헌법이 부여한 '비상조치권'을 발동했다.

개헌의 방향으로 4년 중임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등 지금까지 실험된 모든 체제가 다 제시됐지만 이런 제도 자체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만능키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럴 것이란 막연한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헌법을 고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고쳐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의 개헌 주장은 이런 순수한 문제의식의 발로가 아닌 듯하다. '재집권에 유리할 듯해서(여당), 정권 탈환에 유리할 듯해서(야당)'가 숨은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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