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분위기 적절히 편승한 반기문
원내교섭 단체 4당에 모두 갈만해
귀국하면 팽목항'봉하마을 갈 예정
정체성은 '출세'위해 갈아 입는 예복
정유라의 부정 학사관리 혐의로 구속된 이화여대 류철균 교수의 소설 제목이다. 원래 이 제목은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를 차용한 것이다. '리어왕' 1막 4장에서 정체성의 혼란에 빠진 왕은 이렇게 외친다.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이 대사를 들으면 최근 한국 보수의 구세주로 추앙받는 한 인물이 떠오른다. 바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다.
반 전 총장이 처음으로 국내 정치판을 기웃거릴 때만 해도 그는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선후보 자리를 넘봤다. 2014년 11월 당시 새정연의 권노갑 고문은 "반기문 총장의 측근들이 와서 (반 총장이) 새정연 쪽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으면 쓰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고 밝혔다. 반 전 총장이 뉴DJP 연합의 구상으로 새정연 내 호남세력의 의중을 떠봤다는 얘기다. 이때만 해도 그는 친노 주자인 문재인의 대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2015년 말 새정연이 분당사태를 겪으며 다가올 총선 및 대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친박 후보로 행세하기 시작한다. 골수 친박인 윤상현 의원이 작고한 성완종 회장의 뒤를 이어 충청포럼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반기문'이라는 대안을 갖게 된 새누리당의 친박은 그 자신감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에 이어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김무성 대표마저 내치게 된다.
반 전 총장 자신도 분위기에 적절히 편승했다. 2015년 추석 기간 중 박근혜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는 6일에 걸쳐 7번을 만났다. 2016년 1월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위안부 협의를 "역사적 용단"이라 치켜세우는 한편,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뉴욕 맨해튼에까지 새마을운동이 번지고 있다"는 낯간지러운 립서비스도 잊지 않았다. 5월 초에는 TK지역인 안동을 방문해 제왕목을 식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4'13 총선 참패와 친박 세력의 당권 장악으로 새누리당의 앞길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러자 반 전 총장은 6월경 뉴욕을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의원에게 뜬금없이 면담을 요청한다. 이 의원은 누구나 알다시피 친노의 좌장이자 충청권 맹주 중의 한 사람이다. 이 만남은 반 전 총장 측에서 비공개를 원하는 이 의원의 요구를 무시하고 면담 일정을 공개함으로써 결국 무산되고 만다.
작년 10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벌어지자 반 전 총장은 이제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2월 9일 반 전 총장은 "국가의 리더십이 국민을 배반했다"며 박근혜 정권과 명확한 선을 그었다. (새해에는 박 대통령에게 연례적으로 하던 안부전화마저 하지 않았다.) 그 얼마 후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반 전 총장 측에서 사람을 보내 자신을 밀어준다면 국민의당으로 오겠다"고 말했다고 밝힌다.
한편, 바른정당은 지구당을 창당하며 대전'세종'충청 지역은 일정에서 빼놓았다. 물론 반 전 총장을 받기 위한 배려다. 결국 반 전 총장은 원내교섭단체 네 당 모두에게 갈 만한 후보다. 즉 그는 여당 후보이자 야당 후보이고, 친박 후보이자 비박 후보이며, 친문 후보이자 비문 후보인 셈이다. 그뿐인가? 비박-비문의 제3지대 후보일 수도 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귀국하면 먼저 팽목항부터 방문하겠단다. 이제는 박근혜 정권의 눈도장을 받을 필요가 없어진 게다. 팽목항에는 아무리 늦었어도 안동에 나무 심으러 갈 그 시간에는 갔어야 한다. 봉하마을도 찾겠단다. 이명박 정권 눈치 보며 노무현 전 대통령 참배도 언론에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던 분이다. 그깟 추모 영상 하나 찍자는 요청도 매정히 거절했던 분이 왜 갑자기 그곳에 가고 싶어졌을까?
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본인은 자기가 누군지 알까? 내 생각에 본인도 모르는 듯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에게 '정체성'이란 '출세'를 위해 자주 갈아입어야 할 예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사화 꽂고 당나귀 타고 귀국한 그에게 묻고 싶다. "Who the hell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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