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보톡스와 헤어롤

인류가 개발해낸 생화학물질 가운데 최악의 독극물은 보틀리눔 톡신(Botul inum toxin)이다. 육류나 생선이 부패하면서 발아하는 독소인데 식중독을 일으킨다. 정제된 보틀리눔 톡신은 10억분의 1에서 5억분의 1g 분량을 주사로 투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독성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하면 보틀리눔 130g이면 전 인류를 독살하고도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이런 독성 물질도 마다않는다. 미용 시술에 널리 쓰이는 '보톡스'의 원래 이름이 바로 보틀리눔 톡신이다. 보틀리눔 톡신을 수십억 분의 1 정도로 희석시켜 피부에 투여하게 되면 얼굴 근육을 일정 부분 마비시켜 주름을 펴는 효과를 일으킨다.

뜻밖에도 보톡스는 타인의 표정을 읽는 능력, 즉 공감 능력을 떨어뜨린다. 몇 년 전 이탈리아의 한 연구기관에서는 보톡스가 타인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감정을 파악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보톡스 때문에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타인의 표정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점이 놀랍다.

보톡스 탓인지 요즘 거리에는 표정이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 '피부는 권력이라는 신화'가 세상을 관통하고 있는 듯하다. 보톡스'필러 시술, 마늘 주사, 백옥 주사 등 온갖 시술이 동원된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노화는 숙명이다, 거스를 수 없기에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마음 건강에도 좋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타인과 잘 소통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기품과 미(美)는 보톡스 따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탄핵 선고일인 지난 10일 언론에 공개된 한 장의 사진을 보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숙고에 빠져본다. 이정미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출근하면서 찍힌 사진 한 컷이었다. 그의 머리에는 핑크색 헤어롤 두 개가 얹혀 있었다. 카메라 세례가 예정돼 있었는데도 스타일리스트에게 맡기지 않고 평소대로 스스로 머리를 매만지고 손질한 흔적이었다. 일에 몰두하느라 얼마나 경황이 없었으면 헤어롤 빼는 것도 잊었을까. 사람들은 감동했다.

다리미로 다린 듯이 탱탱한 얼굴과 치장하는 데 몇 시간씩 걸리는 올림머리보다는 자연스러운 주름살,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가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것이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삶의 훈장'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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