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는 대한민국 명장이다] <15> 농업기계 명장 강대선

경운기·이앙기·바인더…농기계 국산화에 한 축 담당 큰 보람

콤바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강대선 농업기계 명장
콤바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강대선 농업기계 명장

"내 혼이 들어간 농기계로 농사짓는 농부의 모습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과 희열, 보람을 느낍니다."

농업기계 명장 강대선(64) 씨는 자신이 만든 농기계가 농민의 노동력을 덜어주고 생산비 절감과 소득 증대로 이어지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농업에 맞는 성능도 좋고 안전한 농업기계 국산화에 한몫한 것 같아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했다. 강 명장은 "앞으로도 농업기계 발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일조하고 싶다"고 했다.

◆"돈 벌기 위해 공고 진학"

강 명장은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8월, 경남 진주에서 1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업이 잘돼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지냈다. "당시 아이들이 부러워했던 자전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집안 형편이 괜찮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초교 1학년 1학기가 끝나갈 때쯤 아버지 사업이 기우는 바람에 더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됐다. 작은 셋방으로 이사했다. 방 두 개가 있는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강 명장과 어머니, 누나, 여동생 3명 등 여섯 식구가 한 방에서 생활했다. 뜻밖에 일을 당한 어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장사를 시작했다. 강 명장은 "당시 많이 힘들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버지가 어디서 사는지조차 몰랐다"고 말했다.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강 명장은 "태어나 처음으로 돈을 벌어 집안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졸업할 즈음, 누구와도 상의 없이 진주기계공고에 원서를 냈다. 작은아버지는 이런 결정을 한 조카를 나무랐다. "작은아버지는 하나뿐인 조카가 공부했으면 했다. 농업전문학교(5년) 졸업 후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러나 강 명장의 생각은 달랐다. "공고를 졸업해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강 명장은 고교 3학년 첫 시험을 치른 뒤 4월 중순 실습을 나갔다. "대동공업(1984년 대구 달성공단으로 이전)이 진주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실습을 했다"고 했다. 실습을 마친 그해(1971년) 가을, 정식으로 대동공업에 입사했다. 강 명장은 입사 후 한 번도 외도하지 않고 36년을 근무하다 2008년 명예퇴직했다.

◆제안왕'지식왕, 그리고 명장

강 명장이 대동공업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생산 전반에 걸친 검사 업무였다. "신입이었지만 중요한 부서에서 일했다. 왜냐하면 당시 제대로 공부하고 기술을 익힌 기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강 명장이 대동공업에서 근무를 시작할 당시 우리나라도 농기계 국산화 개발 붐이 일 때였다. 기술이 출중했던 강 명장은 다기통엔진 자동조립라인 설치 프로젝트에 참여해 엔진자동화라인을 구성하는데 한몫했다. "당시 농기계에 대한 축적된 기술이 없어 실험을 정말 많이 했다"면서 "시행착오를 수없이 거듭하다 성공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강 명장은 "일은 어려웠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고 했다. 경운기를 비롯해 이앙기, 바인더, 트랙터, 콤바인 등 농기계가 국산화되는 것을 보면 뿌듯함이 커 힘든 줄 몰랐다. "어떤 문제든 고민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답이 나오고 풀렸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행복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강 명장은 일을 발전적으로 하기 위해 농업기계운전기능사, 농업기계산업기사, 농업기계 지게차 운전기능사 등 농기계 관련 자격증도 여럿 땄다.

강 명장은 수동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불합리한 것을 바로잡는 한편 공정 개선, 지식 제안 등 많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 가운데 폐유를 정제해 다시 사용하는 오일 정제기술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별한 기술이나 장치가 필요 없는 정제기술은 기름 사용을 10분의 1로 줄이는 등 비용 절감에 기여했다. 이런 공로로 강 명장은 2000년 사내 제안왕, 2002년 지식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농기계에서 업적을 쌓은 강 명장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부르는 곳도 많았다. 농기계 수리 기능대회 심사위원 및 자격검정 감독관, 국가기술자격검정 모니터 요원으로 위촉돼 활동하기도 했다.

강 명장은 꾸준히 자기 계발도 했다. 늦은 나이(2000년)에 한국폴리텍 컴퓨터응용기계과에 입학했다. 낮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엔 대학에서 공부하는 등 주경야독을 했다. "경험에 이론을 더해 체계를 잡으니 공부가 재미있었다. 힘들지도 않았고 학교 가는 일이 즐거웠다. 무엇보다 자식 같은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고 술회했다.

2003년 명장이 됐다. 강 명장은 명장에 선정된 후 고향 진주에 가니 문중에 경사가 났다며 마을 입구에 걸어놓은 플래카드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동안 힘들게 노력한 기억도 떠오르고,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농업기계 개발에 기여하고 싶어

강 명장은 우리나라 농업 기계화와 함께해왔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농업은 사람의 힘과 소와 말 등 축력을 이용한 '전근대적' 농법이 주류를 이뤄 생산력 향상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축력을 동력으로 바꾼 계기는 1972년부터 시작된 농업 기계화 5개년 계획이었다. 농업 기계화 5개년 계획의 핵심은 동력 경운기를 벼농사 분야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확대 보급으로 동력 경운기는 영농의 주축 기종으로 부상했고, 농업 기계화의 상징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시행된 제2차 농업 기계화 5개년 계획의 핵심은 '벼농사의 일관 기계화 추진'이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3차 농업 기계화 5개년 계획과 1990년대 시작된 '농기계 반값 공급 계획'은 벼농사의 기계화율을 98%로 끌어올렸다.

강 명장은 이 과정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농촌 길을 가다가 내가 개발한 농기계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면서 "농기계 국산화에 일조한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강 명장은 대동공업에서 2008년 명예퇴직을 하고, 농기계 사용 매뉴얼을 만들어주는 업체에서 10년째 이사로 일하고 있다. "수십 년간 해온 일의 연장이라 별 어려움 없이 즐겁고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강 명장은 후회 없이 살았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우리나라 농업기계 개발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 "나의 경험과 기술을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돕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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