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⑤·끝…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당신이 하찮게 여기던 딸이, 아들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하와이서 3년을 살며 둘째 아이를 낳았다. 지상 낙원이란 하와이였지만 남편은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했다. 남편이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 같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시험이라 부담이 컸지만 학원에 등록하고 남편보다 몇 배로 공부해 단번에 합격했다. LA에서 70여㎞ 정도 떨어진 남편의 막냇동생이 사는 레드랜드로 이사했다.

남편과 같이 미국인 회사에서 부동산 일을 시작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발자국만 옮겨도 영어가 문제였다. 모든 것을 영어로 작성하고 영어로 말해야 하는 미국이 아닌가. 더구나 미국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동산 사업에서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업상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에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다. 혹시나 하고 한국말로 두어 줄 써서 우리 회사 부동산 광고란에 끼워 넣었다.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서비스합니다.' 그러자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집을 팔겠다는 분이 전화했는데 나처럼 국제결혼을 한 분이었다. 첫 손님이자 첫 리스팅(Listing), 그리고 나를 부동산 에이전트로 키워낸 시조가 되신 분, 바로 미시즈 헨슨이었다. 그분이 영어를 못 해서 나를 찾은 게 아니라 그리움을 나누고 싶어서라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그분한테서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언젠가 미시즈 헨슨을 다시 만나는 날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집을 내 놓은 지 3일 만에 팔려 미국에서 처음으로 부동산 에이전트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매일 그런 행운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동양인인 내가 보수적인 백인들을 상대로 백인 에이전트와 경쟁을 하면 나는 늘 패자가 되곤 했다. 고정관념과 지속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는 그들이 영어가 서툰 나를 선택할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깊은 늪 속에 빠져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들가지라도 붙잡고 그 늪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딸이라고 무시한 아버지의 차별을 이겨내듯,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당신들을 이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잡고 매달린 동아줄이었다.

나는 한 지역을 골라서 꾸준한 일대일 마케팅 전략을 폈다. 우선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자주 그들을 만나고 필요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서툰 영어지만 세미나를 쫓아다니며 지식을 넓히고 선배들의 경험담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나갔다.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아무도 없는 시간에 배운 것을 혼자 연습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미래의 손님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을 기록해 공부를 했다. 그런 세월이 1년을 넘어서자 드디어 나를 찾는 손님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몇 개의 리스팅을 확보하면서 영어 문제도 조금씩 풀리고 자신감도 붙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백인 에이전트보다 더 꼼꼼히 잘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 어쩌면 그것은 나를 무시한 아버지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당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딸이 저 높은 곳에 세우려고 애쓰던 아들보다 낫다는 것을 꼭 증명하고 싶었다. 어느덧 그것은 내가 성공해야 하는 이유요 목적이 돼 있었다. 일단 내게 일이 맡겨지면 손님들의 만족을 끌어내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엄마는 네가 성공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고 실패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굽히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했고 또 성공을 이뤘지 않느냐? 미국에서 일한 오랜 세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느냐! 때로는 그들의 친구처럼, 자매처럼, 가족처럼 그리고 생활의 상담자처럼!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너의 큰 성공이 아니라 네가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다.'

나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모처럼 오랫동안 나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차별을 받으며 피해와 슬픔 그리고 난관 속에서 성공에 대한 콤플렉스가 엄청나게 심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나 세상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똑똑한 사람이고 싶었고 큰 성공을 거둬 어머니의 기대에 보답하는 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모른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진정 원한 것은 부나 성공, 명예가 아니라 남편, 자녀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때의 실패는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행복해할 충분한 조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미국의 사법 시스템을 배웠고 가정을 다시 찾게 되었다.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신용으로 잘할 자신이 있다.

아직도 많은 손님들이 나를 믿고 찾아준다. 내가 거둔 결실이 비록 대단치는 않아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에 비해 출발선에서 훨씬 늦게 시작한 나로서는 내 삶에 대한 긍지로 뿌듯해진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무엇보다 엄마를 소중하게 여기는 두 아들이 곁에 있다. 엄마가 일 때문에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어도 두 아이 모두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훌륭하게 잘 커주었다. 남편과 오랜 상의를 한 끝에 나는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많은 사람들의 이웃으로 그리고 친구로 나는 돌아왔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구시대의 완고함과 좌절된 꿈을 안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학대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비록 그가 나를 많이 슬프게 했지만 나를 꺾어지지 않게 단련시키고 불굴의 강인함을 길러 주기도 했다.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욱 위압적인 태도를 보였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나를 소송으로 곤경에 빠뜨린 사람도 용서해 주고 싶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 자신을 찾는 일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올해는 어머니가 기다리던 드들 강변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 강 언덕에서 딸을 기다리다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 주실 것이다. 드들 강 언덕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살을 에는 찬바람은 간데없고 따스한 봄바람이 내 발길에 함께할 것이다. 물 따라 흘러가며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고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을 강둑에 남기며 천천히 오래오래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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